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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Nov 08. 2019

숲 속의 사람에게서 모성애를 본다

더 이상 동물쇼를 관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딸아이가 밖에서 팸플릿 한 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거기에는 '나는 영장류 쇼를 관람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저도 오래전부터 동물쇼 관람을 하지 않던 터라 팸플릿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가 '동물권'을 주장하며 체험 동물원과의 소송도 불사했던 일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죠.


아래의 내용은 제 개인의 기억을 떠올려 혼자 끄적인 글입니다.




20여 년 전쯤 제주도에 어린 조카를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집안의 첫아이였던 까닭에 모든 가족들은 한결같이 녀석을 아꼈고 더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동물원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가족들이 동물쇼를 하는 수중 체육관(?) 같은 곳에 앉아 있게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난생처음 아주 희한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물개가 탬버린을 흔들고, 심벌즈와 모형 피아노(소리는 다 나옴)를 치며, 고리 통과하기, 공 튕기기 등등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다. 물속에서 현란하게 헤엄치다가도 갑자기 무대 위로 솟아올라 미끄덩대며 계단을 오르내리기까지. 그런 모든 장면을 보던 나는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도 없는 물개가 어떻게 된 게 사람인 나보다 악기 연주를 훨씬 잘할 수 있을까?

고리 관통과 주둥이로 공 튕기기. 그게 가능한가?


물개가 뛰어난 건지, 내가 물개 지느러미만도 못한 건지 헷갈려하는 와중에도 쇼는 쉬지 않고 진행되었다. 1초라도 쉬면 모두가 망해 버리는 마법에라도 걸렸는지. 사육사는 온갖 재주를 요구했고, 물개는 실행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물개뿐이 아니었다. 덩치가 더 큰 바다사자까지 나와서 물이 흥건한 무대 위를 어린애 배밀이하듯이 왔다 갔다 하는데 보고 있자니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가족은 어쩌자고 어린 조카를 이런 곳에 데리고 왔단 말인가. 나 스스로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쇼가 진행되는 20여 분이라는 시간 동안 물개와 바다사자는 정말 한시도 쉬지 않고 주어진 미션을 기계처럼 해나갔다. 물개 반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세 살짜리 조카 녀석도 성질이 나면 울고불고 길거리에서 드러눕기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큰 물개와 바다사자는 '반항'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었다.

'쟤들한테 약 먹이지 않고서는 저렇게 쇼를 할 수가 없다. 약 먹였다....'


물개랑 바다사자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아니, 아니. 애완동물이라고 해도 그렇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 중에 악기 연주되는 개나 고양이가 있던가?


혹시라도 있다 치면 그 개나 고양이가 동시에 고리도 통과하고 수영도 하고 공도 튕기고. 물 첨벙에서 배밀이도 하고 등등. 그렇게 전 종목 다 마스터할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한가?


그곳은 결단코 동물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각양각색 동물쇼를 가르치는 스파르타 기숙 학원이었던 거다. 약 복용 없이, 학대 없이, 강요 없이 물개와 바다사자가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만무하다.


물개와 바다사자가 집단 정신병을 앓지 않는 이상. 자신의 본능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에게는 어떤 의미라고는 없는 탬버린 쪼가리랑 심벌즈 두 짝을 왜 두드리고 있겠는가?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동물쇼라면 노이로제에 걸려서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안 본다고 동물쇼가 사라질 거라 믿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나 하나라도 안 봐서 수요를 줄이는 쪽에 힘을 싣고 싶었다.






그 후로 십수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오랑이도 안다'라는 구호 아래 사람들의 투표 참여 운동에 동원된 오랑우탄이었다.


점퍼 입고 운동화 신고 투표 날짜와 방법까지 아는 똑똑한 오랑이가 독려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선거권 행사조차 할 수가 없나?




오랑우탄은 나와 너를 구분하고, 자아가 있으며, 화해할 줄 안다. 사람과는 오직 3%의 유전자만 다르며 숲 속 높은 나무 위에서 본연의 생태적 지위를 지니고 삶을 살아가는 '숲 속의 사람'으로 불리는 동물이다.


오랑우탄의 평균 수명은 45세이고 새끼는 8년간 어미의 보살핌을 받으며 삶의 노하우를 익힌다고 한다. 8년이라는 육아 기간은 오랑우탄 생애 20%를 차지한다.


인간도 그렇지 않은가.


100세 시대에 스무 살까지, 아니 캥거루족이면 서른 살, 마흔 살 넘어서까지 자신들의 새끼는 품 안에서 키우면서 같은 본능을 가진 오랑우탄에게서는 야멸차게 새끼를 떼내어 인공 포육을 시킨다.


도대체 어떤 이가 3%의 유전자 차이만으로도 이런 행동을 자행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오랑우탄의 모성 본능도 인정해 주고 무리한 동물쇼 관람에도 반대 의사를 내 보이면서 우리의 아이들을 키운다면,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조금은 더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 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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