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살다가 6년 전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서 인천 송도로 이사를 왔습니다. 지역의 특성상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들이 많았어요. 남편은 회사에 가고, 아이는 전학만 시키면 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딱히 제가 할 일이 없어 보였어요.
집 꾸미기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난생처음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사 전에 이것저것 인테리어를 알아보며 '홈 스타일링'이라는 개념을 접했어요. 말 그대로 전문가가 저희 집의 스타일을 잡아주는 것이었는데요. 과감하게 선택을 했습니다.
전문가의 손길에 따라 우리 집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구입해야 했지요. 그중 하나가 소파였습니다.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검은색 소파가 있었는데 새 집으로 이사 가면서 뭔가 아쉽다는 거였어요.
누가요? 전문가가요.
결론은 집 크기에도 안 어울리고 검은색이 칙칙하니 소파를 구입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전문가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녀가 권하는 것들을 착실하게 수첩에 정리했습니다.
홈 스타일링 전문가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작업한 집의 사진을 찍어서 홈페이지 등에 카테고리별로 올립니다. 자신들의 전문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고객이 낡은 물건만을 고집해서 제대로 스타일링이 살아나지 않은 사진들을 올릴 수는 없는 거죠. 전문가의 손길이 닿기 전과 후의 환경이 드라마틱하게 차이가 나야만 고객 확보가 용이하지 않을까요?!
결국 저는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별별 걸 다 샀습니다. 집 전체의 커튼과 목재 블라인드, 식탁, 침대, 서재에 들어갈 책장과 책상도 전부 다 바꿨어요. 전문가의 말을 참 충실히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상 전문가가 버리라고 지정한 것들을 못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일단 검은색 소파를 못 버리게 되는데요. 저희 남편과 딸아이가 오래된 소파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습니다.
새로 산 흰색 소파가 불편하다며 오래된 소파에만 앉으려고 해서 결국 버리지도 못하고 방 한구석에 넣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거실로 끌고 나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죠.
식탁을 거실 창가로 이동하고 비어버린 주방 벽이 오래된 소파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저희 집 식구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남편과 딸아이는 거기 가서 앉아 있고. 드러누워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 66%가 원하는 소파를 저 혼자만의 결정으로 처분할 수 없어서요. 6년째 소파 2개를 놓고 삽니다. 그 사이 새로 들인 소파도 늙은 소파가 되어가고 있지만 식구들이 잘 앉지 않습니다. 보기만 그럴듯하고 그다지 편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죠.
맥시멀 리스트인 저는 딸아이가 17세인 지금도 어릴 때 깔아 놓고 쓰던 놀이방 매트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거실에 깔아 두고 면 패드 하나 덮어 놓으면 폭신폭신해서 앉아 있기 좋거든요. 예뻐 보이기만 하던 소파가 별로 편하지 않으니 저는 주로 바닥의 놀이방 매트에 누워서 생활합니다.
전문가가 버리라고 지정해줬던 것들 중 버린 것은 거의 없고요. 사들인 것만 잔뜩이었던 홈 스타일링. 엄청난 비용만 낭비한 결과를 가져왔지요.
<초예측>에는 세계 석학 8명이 말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책에서 유발 하라리는 행복이란 객관적인 지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대치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해요. 기대했던 것이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형편이 좋아질수록 기대치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성취감이나 즐거움을 경험하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누리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더 먹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죠. 더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한, 만족하는 일은 없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인류는 석기시대에 비해 수천 배 이상의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배만큼 행복해졌을까요? 우리는 힘을 얻는 데 뛰어난 소질이 있으나, 힘을 행복으로 전환할 줄 모릅니다.
<초예측> 인류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22쪽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지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구별하는 능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업이나 돈, 국가나 사회 등 '허구'를 신봉하는 바람에 돈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전쟁에 나가 살상을 일삼기도 했다는 거죠.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현실과 허구를 구분해야 하는데요.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구분법은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고통'을 느끼는가?를 살펴보는 데에 있습니다.
돈도 기업도 국가도 괴로움이나 고통을 느끼지는 않아요. 고통과 괴로움의 몫은 온전히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들의 몫입니다. 고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허구'에 의해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인간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허구가 필요하지만, 허구를 도구로 보지 않고 그것을 목적이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초래될 고통은 실존하는 우리들의 몫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초예측> 인류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18쪽
저는 새 집으로 이사하면,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홈 스타일링을 받으면, 새로운 물건들을 사들이면 어떤 걱정거리도 문제도 없을 줄 알았어요. 돈과 시간을 들여 집을 꾸미고 각종 물건들을 구비하면 투자한 만큼 '나의 행복'도 커지리라 믿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돈이라는 허구'로 행복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거예요.
그러나 삶은 새 소파 하나 들여놓고. 집안 인테리어 해놓았다고 계속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끊임없이 더 사고, 갖고 싶은 욕망이 있는 한 저의 행복은 늘 내일로 유보될 수밖에 없었어요. 저것 하나 사면 좋을 것 같은데, 남편이 더 능력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가 공부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그렇게 날마다 조건 하나씩을 내걸다 보면 우리는 언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후에 조금 깨달았습니다. 홈 스타일링 전문가는 바로 '나'이어야 한다는 걸 말이지요. 우리 가족 구성원의 생각과 생활 패턴과 가치 지향적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춰 계획하고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는 아내이자 엄마인 제가 적임자 아닐까요.
홈 스타일링 전문가의 손길을 받은 집은 초창기에만 그 상태를 유지했고요. 지금은 그냥 제 맘대로 삽니다. 소파 위에는 빨래가 쌓여 있고요. 바닥에는 15년도 더 된 놀이방 매트가 깔려 있습니다. 아이방에 있어야 할 각종 물건과 컴퓨터가 거실로 나와 있습니다.
며칠 전 오후. 빨래를 개켜야 했고요. 놀이방 매트를 빨아야 했습니다. 그것들이 정리된 직후 제 마음도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어요. 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정리하고 싶지 않을 때는 널브러진 채로 살 겁니다. 그러다가 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치울 거예요.
내 행복을 위해서 허구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조절 능력'을 키워 나갈 겁니다. 인생 후반전. 누구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만으로도 저는 다행이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