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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Dec 09. 2019

우리는 모두 모노산달로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딸아이는 두 번째 에어팟을 잃어버렸다며 찾기 시작했다. 2년 전에 에어팟을 잃어버려서 새로 사줬더니 또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손때 묻은 물건을 잃어버리면 두고두고 떠올리며 전전긍긍하는 타입인 나는 어떻게 해서든 물건을 찾아내는 쪽이다. 딸은 나를 닮지 않았다. 조금 찾다가 없으면 바로 포기한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물건을 잘 사지도 않았지만 만약에 샀다고 해도 아껴두고 낡은 것만을 고집하며 쓰던 사람이다. 낡은 것이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드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서랍 속에 쟁여둔 새 물건을 꺼냈다. 아버지에게 물건이란 부러지면 테이프로 감아 쓰고 고장 나면 고쳐 쓰고 찢어지면 꿰매 쓰고 깨지면 덧대서 써야 할 것들이지 취향 따라 유행 따라 싫증 난다고 구입해야 할 것들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노트도 사촌 동생이 아르바이트로 일해주던 학원에서 잔뜩 얻어 온 메모장을 썼겠는가. 새 노트가 있어도 전단지의 빈 곳에 글을 썼고 주로 이면지를 썼다. 이면지를 묶음으로 만들어 놓고 메모를 하던 아버지에게 사촌 동생이 가져다준 메모장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노트였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메모장에 또렷이 박혀 있으나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는 대지 학원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버지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머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 내려갈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준 대지 학원 메모장이 고맙다.


대지학원 메모장


이렇게 물건을 아끼는 아버지였던 까닭에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도 드물었다. 잃어버렸다고 해도 반드시 찾아내려 애썼다. 아버지의 딸인 나도 그런 편이다.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사실을 모르거나 '또 사면되지.' '좋은 걸로 바꾸면 되지.' '없어져도 그만이지.'라고 생각하며 잃어버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은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야 두 번 다시 또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게 모르게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성향인 것 같다.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려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그렇게 신중하려고 했으면서도 나의 의지나 꿈에 관해서도 그러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진다. 한때 나에게는 소망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꿈에서 뚝 떨어진 채 살아가던 시간이 있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행위는  앞으로도 나에게 속한 어떤 것들이 나를 떠나버려도 상관없다는 뜻처럼 보인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물질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관계된 어떤 것에도 마음 한 자락 내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을 주지 않았으니까 없어져도 나와는 특별히 상관없다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혹시라도 잃어버린 게 있다면 직접 찾아 나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끝내 못 찾더라도 찾기 위해 수없이 시도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한순간 내게 속해 있던 그 물건, 그 가치, 그 신념을 길바닥에 나뒹굴게 하고 싶지는 않다. 때에 따라서 잃어버린 자는 될지라도 '잃고도 속상해하지 않는 자.' '잃은 것을 당연해하는 자.' '잃은 후에 대책도 세우지 않는 자.'로 살아가기는 싫다. 그런 스스로를 보는 건 너무 슬플 것 같다.


어릴 때 우리 집엔 아버지가 사다 놓은 50권짜리 빨간색 세계 동화전집이 있었다. 세계 각국의 민담부터 환상적인 이야기와 신화까지 전부 다 들어 있었다. 그중에 우리 형제들이 가장 자주 보던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어린 우리들의 눈에는 신들의 이름이 터무니없이 복잡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신화 속 인물들은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고 찾으러 떠나는 사람이었다. 그 과정 자체가 바로 모험이었다. 그들의 모험을 멀리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고 벅찼다.  그리스의 자존심인 금양 모피를 손에 넣기 위해 아르고 원정대를 이끌고 떠난 이아손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한쪽 샌들만 신은 사람을 가리켜 모노산달로스라 부른다. 이아손은 모노산달로스이다.


그는 이올코스라는 나라의 왕자였다. 아이손 왕의 아들로 숙부 펠리아스에 의해 왕좌를 빼앗기고 15년간 산속에 숨어 살며 수행을 한다. 그런 그가 각성 끝에 자신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내려오던 길에 노파를 만난다. 심술궂은 노파는 자신을 업고 강을 건너라고 하는데 무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디 메다꽂을 수도 없는 괴팍한 노파를 업고 오다가 이아손은 샌들 한 짝을 강에 떠내려 보내고 만다.


당시 동네에서는 아이들 사이에 이런 내용의 노래가 번지고 있었다.

"모노산달로스가 내려와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네."

우리나라 서동요와 마찬가지다.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여 결국 아내로 맞아들인 것처럼 모노산달로스가 왕이 된다는 것은 신탁에 의해 결정지어진 이아손의 운명이었다.

멀쩡하게 샌들 두 짝을 신고 있던 이아손은 신탁대로 강물에 신발 한 짝을 떠내려 보내면서 모노산달로스가 되었고 마침내 이올코스의 왕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써 금양 모피를 얻기 위해 아르고 원정대를 꾸려 험난한 여정 앞에 서게 된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우리는 혹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닌가?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사람은 신발 한 짝 이상의 어떤 것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잊고 지냈던 자신에 대한 탐색에 들어갈 수 있다. 이아손은 왕좌를 찾기 위해서 결국 위험한 도전에 응전하는 삶을 택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각자가 잃어버린 것,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다 보면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 움직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올 한 해는 나의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

.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딸아이가 포기 대신 집요한 추적을 이어나갔고 며칠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아이팟을 찾아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낸 경험이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를 또 잃게 되더라도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나 움직이게 될 것이다. 최소한 팔짱 낀 채 뒤로 물러나서 방관하는 삶은 살지 않을 거다.


'찾는다'는 행위는 그렇게 고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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