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하게 담아낸 나의 장애 이야기
6년 전으로 한번 거슬러 가보자.
일 잘하는 현대 여성이 꿈이었지만 그만큼 두뇌가 명석하지 않았던 나는 비-잉 비-잉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시험과 세 차례의 수업 테스트 후 합격한 학원에서는 1년 간의 선생님으로서의 활동을 권유했고 목표 실적에 도달하면 프로팀장 전환 후 본사 발령을 제안하였다. 나쁘지 않았던 제안이라 흔쾌히 수락하였다. 뭐든지 빨리 해치워야 직성에 풀리는 성격과 목적을 정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기질이 합쳐지면 그건 정확히 강력한 무기였다. 단, 손잡이 없이 양 끝이 뾰족하게 날이 선 그런 무기.
남들은 빠르면 1년, 보통은 3년 이상이 걸린다는 프로팀장을 단 7개월 만에 제안을 받았다. 그 어느 때보다 기뻤다. 오랜 시간 늘 긴장을 하여 딱딱하게 굳어 온 상태로 살아오던 사람이 단숨에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운동선수들이 뭉친 근육을 풀 때에도 근육 주변을 살살 어루만져가며 서서히 근육을 풀 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와 똑같다. 몇 달을 5시간도 채 잠을 못 자며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온 나는 조금씩 긴장을 푸는 연습을 했어야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20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긴장을 하며 살아온 때가 없었던 것이다.
연어샐러드와 따뜻하게 데운 사케.
쓰러지기 전날 먹었던 메뉴이다. 특정 음식을 먹고 탈이 났던 경우에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다시 먹기 꺼려하던데, 나는 여전히 두 가지의 음식을 즐겨 먹는 편에 가깝다. 사실 좋아한다.
응급실에서 꼬박 이틀은 잠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틀 동안 유체이탈이라도 경험한 모양인지 응급실 안에서의 상황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사람이 죽는소리를 처음 들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꾀꼬닥’하고 죽던데 내 옆 베드에 누워있던 복수가 가득 찬 할아버지는 손톱으로 마룻바닥을 긁는 소리를 목으로 내며 돌아가셨다. 그 순간 알싸하게 번지던 눅눅한 냄새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진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찍었던 나의 척수 MRI는 빈틈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래서 임상만으로 진단해야만 했던 의사는 나에게 ‘길리안-바레 증후군’이라는 병명을 진단했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생소했기에 나에게는 나의 생존 여부가 가장 중요했다.
“저 살 수 있나요?”
“네, 살 순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살 순 있다니. 그다음은요?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자율신경계 질환이에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정도 회복 기간을 두고 봐야 되고요. 이 병에 대한 특정 약은 없지만 대체로 면역억제제를 쓰니까 우선 2주 정도 투여하면서 지켜보도록 하죠.”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정리하자면 2년 정도는 꼼짝없이 회복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과 약은 있으나 이 약으로 완벽하게 치료가 될지는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으면 사람은 이성적이고 차분해진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휴직계를 내야 한다고 했다. 프로팀장 발령을 하루 앞두고 말이다.
나의 인생 계획에 이런 사건은 없었지만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지라 이 정도는 충분히 이겨내지,라고 용감한 생각을 했다.
“이상한데요. 회복 방향이 길리안-바레 증후군이랑 좀 다르네요. 이상하다.”
무책임한 이야기였다. 이상하면 추가 검사를 해야 할 텐데 그런 것 없이 재활의학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만난 의사는 실력이 출중한 고집불통이었다.
“재검사하시죠.”
레지던트로 보이는 의사가 고집불통인 의사를 말렸다. 이미 진단이 끝난 상황인데 뒤엎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우물쭈물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고집불통 의사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척수염입니다. 이미 염증이 먹고 간 부분이 이렇게 하얗게 나오는 거고요, 면역억제제도 척수염 치료제 중에 하나긴 한데 아직 열도 있고 염증 수치도 꽤 있는 편이라 스테로이드 5일 정도 500ml씩 맞는 걸로 하시죠. 치료가 다 끝나 봐야 아는 거긴 한데 지금 상태로 봐선 상지 쪽에 장애가 남을 것 같네요.”
내가 덜덜 떨며 삐걱거리자 “중증은 아닐 거예요, 아직 젊고 회복력도 좋은 편이니까 가벼운 장애 정도 에상돼요.”라는 소견이 따라왔다.
상상에도 없던 일이 현실에 닥치게 되면 나로부터 초월하게 된다. 밖으로 쏟아내야 하던 울음들이 속으로 삼켜져 완전히 젖은 채 곰팡이가 피고 있었다.
꽤나 많은 양의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면서 피부는 열꽃이 피고 속은 늘 울렁거려 물만 먹어도 토를 했다. 분명히 혈관으로 약을 투여되는데 혀 안 쪽에서 쓴 알코올 향이 올라왔다. 생각지도 못한 진단으로 기력이 없어 꼼짝없이 병상에서만 지내야 했던 나는 낮에는 엄마, 밤에는 당직 의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창창한 20대의 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장애가 생기면 자해 또는 자살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나 하나 건사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염증 따위에 쉽게 굴복하는지, 멍청하게 왜 중추신경계인 척수를 갉아먹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참담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해서 하루 종일 잠만 잔 날도 많았다.
결국 재활의학과에 입원해 있던 3주 동안 내 몸은 회복되지 않았고 퇴원하던 날 고집불통 의사는 고맙게도 “예전처럼 살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래도 살아내야죠, 그쵸?” 살아내라는 말을 해주었다. 살아요, 사세요, 가 아닌 살아내세요. 흘러가는 대로가 아닌 나의 의지로 세상과 맞닥뜨려서 살아라는 말 같았다.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을 비하하고 나약해지며 살아가지만, 살아내라는 말처럼 경주마 기질을 십분 발휘해 또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