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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Aug 14. 2022

나를 떠나간 무수히 많은 것들

진솔하게 담아본 나의 이야기

 아프기 전에는 술을 즐겨했다. 내가 술을 처음 접하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부모님의 여행으로 집을 비운 친구의 집에서였다. 처음 마셔본 맥주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들을 다 씻어 내릴 만큼 시원하고 짜릿했다. 일주일에 여덟 번을 술을 찾는 아빠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서인지 엄마를 제외한 세 가족은 술을 꽤나 잘 마시는 편에 속했다. 내 몸 안에 기생했던 망할 염증이 알코올 분해 세포까지 잡아먹어버린 것인지 지금은 맥주 500cc만 먹어도 취해버리는 몸이 되어버렸다. 혼자 소주 두 병을 마셔도 필름이 끊긴 적이 없었는데 이젠 소주 3잔도 못 먹는 사람이 되었다.  

 가장 먼저 떠난 것은 남자 친구였다.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이후 변변찮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 사람에게 월 300만원씩 꼬박꼬박 벌어오는 나는 뽑아 먹기 좋은 대상이었다.

 “나를 사랑하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를 만나온 7개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면서 퇴근 후 저녁 한 끼, 면접에서 떨어진 후 마셔야만 하는 위로주, 본인의 취미생활을 위한 산악용 자전거, 그리고 생필품까지. 모조리 다 내 지갑을 이용했었다. 사랑을 하면 간이며 쓸개며 다 빼주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이용했다. 후유증이 남을 거라는 이야기를 알렸을 때 어떠한 대답도 없이 도망치던 그 사람의 뒷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틀 후 찾아와서 너 이제 등신 됐네,라며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이미 소화되고 없는 그 전날의 저녁밥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처음 기억하는 설움은 설날에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다 밖으로 내보내고 친손자랑 단둘이서 치킨을 시켜먹은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때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서러웠었고, 훌쩍 커버린 이후에도 그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외할머니는 손자만 편애한다고, 외손녀 따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친손자만 사랑했던 외할머니는 치매를 10년 동안 앓아오셨다가 올해 코로나로 돌아가셨다. 내가 척수염에 잡아먹혔던 그 해에 외할머니의 치매 증상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 시간은 24시간 중 1~2시간 내외였고 현실로 돌아오셨을 땐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게나 우셨다. 오랜 시간 간병을 해오던 엄마가 외할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소하기로 결정했을 무렵 쯔음에, 간신히 돌아온 정신을 붙잡은 외할머니가 나에게 치킨 한 마리를 시켜주셨다. 치킨 먹고 얼른 나으라고, 더 이상 아프지 말라고.

 이상하리만큼 장애인이 되고 나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널뛰는 감정들이 잠잠해졌고 널뛰게 했던 근본인 불안감이 사라진 것 같다. 때때로 고개를 내밀기도 하지만 워낙 불안감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였던 지라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나에게 불안감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현실로 데려와 섣불리 판단하고 걱정하던 감정이었는데, 다시 태어나도 없을 척수염이라는 사고가 이보다 더 견디지 못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제껏 불안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살면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귀엽게 말해서 미웠다는 것이지 사실 지긋지긋하다에 가깝다.

 삶의 중심을 뒤흔들 만큼의 큰 일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초연해지기 마련이다. 슬픔에 빠진 나도, 기쁨에 취한 나도, 모두 다 나라고 여기기 위해서는 이 불안감을 잘 묻어둬야만 했다. 재활전문병원에 입원해있던 시간 동안 나를 들여다보는데 많은 시간을 썼다. 그것이 문제였다, 준비되지 않은 시간들.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의 존재를 증명하던 내가, 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증명하려고 하니 잘 되지 않았다. 특히나 미운 모습의 나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능숙하지 않고 못난 모습들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평가받고 위로받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스스로 오롯이 바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내가 진정 기쁜 것이 맞는 걸까에 대한 질문 없이 타인의 축하와 기대 등의 평가로 판단해왔었다. 그러니 내가 타인의 기대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될 때마다 깊은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모든 것들은 외부 자극일 뿐이다. 내 인생의 하향점을 한 번 경험해 봤으니 언제 한 번 나타날 상향점을 위해서는 밀도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그때 당시에 생각했었다. 내가 단단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 무너지는 것이라고. 작디작은 입자들조차 끼어들 틈 없이 촘촘하게 빼곡하게 가득 들어차게, 꾹꾹 눌러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더라도 나의 밀도를 채워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나로 존재해야 한다. 누군가의 평가에 좌절되지 않고, 만에 한약 좋은 평가로 들뜬다 한들 떨어질 때를 생각하면 외롭고 슬프니까 언제나 나는 나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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