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 박민선
[SESSION 01. 둘째아이]
제법 규모 있는 화장품 회사에 근무한 지 벌써 4년차가 되어 갑니다. 저는 최근, 그러니까 두 달 전 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2년 전부터 계시던 기존 팀장님께서 올 1월부로 퇴사하셨거든요. 예상치도 않게 제가 그 공석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팀장이 된 셈인데, 축하해 주는 이들도 있었고 내심 못마땅한 눈치를 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얻은 감투에 처음에는 벅차고 자랑스러웠지만 그 기쁨도 잠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최근 불면증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좀비 같은 몰골을 하고 사무실을 유랑할라 치면 때때로 마주치는 이들이 걱정스레 물어왔습니다.
- 혹시 집에 안 좋은 일 있으신 건 아니죠?
- 팀장님, 행복해 보이지 않으시네요.
로또에라도 당첨되지 않은 이상 사무실을 행복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겠냐만, ‘행복해 보이지 않으시네요’라는 말은 ‘참 불행해 보이시네요.’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일테지요.
‘중간 아이 증후군’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흔히 ‘둘째 아이 증후군’이라고도 표현하지요. ‘출생 순서에 따른 경향성’이 다소 있더라도 이를 공식처럼 여기지 말아야 할 일 입니다만. 첫째, 막내, 외동 그리고 중간 자녀의 각 성격을 범주화 하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혈액형 성격’이나 ‘MBTI’처럼 대상을 정의함으로써 ‘미지’라는 두려운 영역을 지워 내려는 노력 중 하나이겠지요. 사람의 뇌는 ‘잘 모르는’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왜곡하곤 한다고 하니까요.
‘중간 아이 증후군’은 첫째도 막내도 아닌, ‘낀 자녀’의 성격적 경향성을 대변한다고 합니다. 첫째만큼 주목을 받지도 막내처럼 귀여움을 독차지해 보지 못한, 혹은 그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을 중간 자녀들은, 첫째와 비교 당하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 마땅히 누려야 했을 애정의 상당 지분을 다른 형제 자매에게 수시로 양보하며 자란다는 것이 가설의 요지이지요. 낀 채로 자라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협상과 외교의 기술을 습득하고, 뛰어난 적응력과 독립심을 형성하며, 공감에 능하고 사리에 밝은, 균형 잡힌 성격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애매한 어디 즈음에 내린 채로 싹을 틔워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어난 꽃의 서러움입니다.
저는 ‘첫째임이 분명할 것’이라거나 ‘왠지 막내일 것 같다’라는 말을 모두 들어보았습니다. 흔히들 막내의 특성으로 여기는 부분과 첫째의 특성으로 여기는 부분을 당연히, 두루 가지고 있습니다. 실상은 둘째입니다만.
서론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팀장’이라는 과분한 감투를 쓴 값으로 ‘중간' 직급자가 으레 겪기 마련인 매운 맛을 아주 호되게 보고 있습니다. 말이 ‘장’이지 위에서 찍어 누르는 사람만 해도 수두룩한데, 그 기세에 눌려 한없이 숙이다 보면 밑에서는 또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끝내는 깡통처럼 납작 찌부러져 감투이니 뭐니 다 패대기 치고 일단 숨 좀 쉬고 보자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응당 걸맞은 보상이 따르리라 생각했지만 웬걸, 승진 대가는 ‘옛다, 명예’라며 받은 게 다입니다. 1원 한 푼 얻지 못했던 저야 최악의 경우였지만 다른 팀장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투 값으로 끽해야 사사오입도 못하는 수십 만을 더 받았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그게 어디냐고 반문할 이도 있겠으나 근무 강도는 곱절로 증가했으니 노동 강도는 높아지고 시간 당 급여는 오히려 떨어진 셈 입니다. 명예라는 놈은 참 비싸기도 하지요.
- 팀장님, 대체 어디 계세요.
팀원들은 연일 팀장님의 꼬리를 찾아 헤매기 일쑤였습니다. 그 시각, 전 필시 80% 이상의 확률로 회의에 들어가 있을 테지요.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마다 미팅 스케줄이 잡혀 있는데 빌딩을 타고 오르내리는 시간 또한 만만치 않아서 자투리 시간은 모두 버리는 셈 쳐야 합니다. 지구라도 구하겠다는 양 엄숙하고 진지한 자의식들이 들어차 커다란 회의실이 터질 지경입니다. 치열한 공방과 비장한 설전에 비해 결론은 늘 시시하고 모호해서 투입 대비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허다하지만요. 회의실을 나올 때면 ‘그래서 누가 뭘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의문점만 남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미팅이 끝날 무렵이면 날은 벌써 저문 뒤, 그때라도 업무를 시작할 수 있으면 다행이게요. 확인 못한 메일과 기안이 쌓여 노트북은 폭발하기 일보직전, 연일 늘어지고 있는 안건에 대한 ‘컨펌’ 요청도 밀물처럼 닥쳐 옵니다. 퇴근을 목전에 둔 팀원들은 약간의 힐난을 담아 메일은 확인했는지, 의사 결정은 언제 해줄 것인지 등을 앞다투어 물어옵니다. ‘본론만!’ 혹은 ‘결론만!’이라고 포효하는 내면의 야수를 달래가며, 각양각색의 장광설을 경청하는 척 평온을 가장하지요. ‘제발, 나도 일 좀 하자!’라며 광광 울고 싶은 감정은 이따 집에 가서 소주나 꺾으며 풀어낼 일입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인가 ‘칼퇴근’은 전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무엇’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거 먹는 거,였던가요…?
‘덕장’이 되겠다는 욕심은 사실 자기기만이자 흉내 바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래로는 사회 초년생들을 두루 살피고 위로는 제 임원과 대표를 설득하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요. 상사와의 관계는 사실, 그 전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위에서 명하면 아래서 따른다,라는 깔끔한 룰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받은 지시를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참 껄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전무실에 불려가 팀원 관리가 허술하다는 질책을 받았습니다.
- 등 돌려서 사무실 한번 둘러봐요. 박팀장 팀원들만 없어요.
통유리로 되어 있는 전무실 문 너머로 목요일 저녁 8시 사무실의 전경이 내다 보였습니다. 40여명 남짓 되는 저희 사업 본부의 직원들 중 저희 팀원 9명만이 퇴근한 상태였습니다. 원칙을 따른다면 주 52시간 근무가 맞았습니다. 엉뚱한 곳에 유연성을 발휘하라는 전무님의 지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전무님, 원칙적으로 하자면서요,라는 대답은 어리석었습니다. 애초에 '원칙'이란 것은 없었으니까요. 수시로 바뀌는 지시에 장단을 맞추자니 별 수 없이 미친 척 춤을 추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 내일 박팀장 팀, 그리고 팀원들 각각, 무슨 업무 하고 있는지 정리해서 보고해요. 팀 간 업무 불균형이 있는 것 같아.
울며 겨자먹기로 야근을 강요하라는 것인데, 나쁜 사람은 제가 되고 마는 것이 억울했습니다. 전무님이 시켰다,라고야 할 수 있나요. 그놈의 자존심이 또 구차한 것은 못 참으니까요.
아래 사람에게 두루 공정하겠다는 신념도 현실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매한가지였습니다.
- 팀장님, 팀장님은 혹시 회피형이세요?
각종 민원의 해결이 늦어진다 싶으면 퉁 치고 올라오며 반발하는 팀원이 있는가 하면, 불만이 있을 때 조개처럼 차라리 입을 꾹 닫고 부루퉁 해 있는 팀원도 있었습니다. 주로는 목소리 큰 놈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묵묵한 놈에게 잔업을 몰아주었습니다. 칭찬도, 비난도,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팀원 사이를 조율 한답시고 눈치를 보다 보니, 오고 가는 문자 메시지의 말투가 상냥한지 퉁명스러운지, 이모티콘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도 몹시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직급이 곧 깡패,라는 말은 제 성격과 맞지 않았습니다. 팀원의 기세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스스로가 참 비겁하다 싶었습니다.
앞, 뒤, 양 옆, 평행선 상에 나란히 앉은 제 팀장과의 알력 싸움은 정말이지 가장 골 썩이는 것이었습니다. 각 팀 간 기묘하게 겹친 업무들을 어느 팀이 주가 되어 이끌고 갈 것이냐, 협업의 범위는 어떻게 특정할 것이냐 등을 정하는 과정에서, 신경을 ‘은근하게’ 긁는 미묘한 싸움이 최소 하루 한 건은 벌어집니다. ‘총성’만 없는 전쟁이지 갖은 정치와 외교가 더 시끄러우면 시끄럽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취해가며, 승패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더군요. 차라리 져주는 편을 선호하던 제가 난생 처음 ‘싸움닭’처럼 굴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도 팀원들의 ‘방패’인 척, 보여주기 식의 마지못한 싸움인 때가 대부분이었지만요. 우스꽝스럽게 몸집을 부풀려봤자 기가 눌려 있는 것을 다들 귀신처럼 알아채더군요. 가끔은 이기고 대부분 지는 날들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팀장들의 욕받이 아니면 팀원들의 욕받이 둘 중 하나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욕먹으면 장수한다’라는 말이 진짜라면, 아마 기세 좋게 연금이라도 콸콸 부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은 상급자로서의 체면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팀원들을 보호하는 우산의 매무새는 갖추고 볼 일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물 알갱이 사이 가쁜 숨 뱉어내기도 벅찬데, 그 파랑을 일으키는 큰 바람 내다볼 사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팀원들의 일을 걷어낼수록 저희 팀에 대한 평판은 떨어져갔고, 결국 팀 전체에 해가 되어 돌아올 줄 미처 몰랐습니다. 어설프게 ‘덕장’이 되려 하던 제 사욕은 업보가 되어 정직하게 쌓이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