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후천적인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짧은 시간이더라도 아이와 함께 놀아주며 마음을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말이야 쉽지, 정작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그럴만한 체력도 못 되었다. 한 시간쯤 놀아줬나 싶으면 겨우 5분이 지나 있었다.
나 스스로조차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놀이는 비생산적이자 비실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득 없는 일’은 그저 낭비이고 사치일 뿐, 어쩌다 짬이 나서 쉬게 되면, 다음 노동을 위해 충전하고 있는 것이라며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곤 했다. 생존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일은 내게 있어 죄다 쓸 데 없는 것일 뿐이었다.
“지구는 왜 돌아요? 용암은 왜 뜨거운 거예요?”
“그게 말이지…. 그건 원래 그냥 그래.”
최근 아이들의 어휘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이 하는 대부분의 질문에 그건 원래 그냥 그래,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집요하게 파고들 것을 생각하니 귀찮기도 하고, 나 자신 역시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을 그냥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복잡한 인생,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더 편리하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빛나는 것을 보고 저게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딱 그 정도까지, 그게 별이라면 아, 별이구나. 그 정도까지. 달은 어떻고 별은 어떻고가 아니라, 그저 달은 달이고, 별은 별이고….
놀아 줄 요량도 없이 가만히, 아이들이 노는 모양새를 지켜 보았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별 것도 아닌 일들에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깔깔대는 것이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잠시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이토록 잘난 나는, 아이들의 질문에 척척 답해 줄 만큼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던가. 새는 왜 나는지, 그 많던 호랑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우주의 끝은 어디인지와 같은 크고 작은 질문 외에도, 스스로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분야나 더 알고 싶어했던 분야에서조차 끝까지 파고든 적이 없었다.
몸이 늙어지는 것보다 마음이 늙어지는 것이 더 슬프다. 만물이 그렇게나 선명하고 밝았는데, 이젠 그저 모두 희멀건 한 안개에 싸여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발견해 내고 배워 나가는 과정에만 오롯이 몰입했던 적이 있었다. 성공하려는 욕심 없이, 그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는 것 자체가 희열인 때도 있었다. 나 제법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오만해진 순간, 총천연색으로 찬란하던 세계는 반짝임을 잃었고, ‘왜 사는가’에 대해 끙끙 고민하며 구덩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슬슬 내려갈 차례라며, 이제 잃을 것만 남았다고. 왜 먹지? 왜 벌지? 왜 살지? 어차피 죽을 텐데.
“엄마, 우리가 여기 있을 동안 엄마는 편히 쉴 수 있겠지요?”
언젠가 친정집에 아이들을 맡길 때 아이들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구나. 모르는 척 해도, 모두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구나. 이 아이들이 내 품에서 떠나 제 갈 길로 훨훨 떠나갈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과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난 세월 듣지 못한, 아름다운 말들을 듣는 ‘지금’은 아마도 다시 없을 순간이 될 것이다.
“엄마, 나는 하늘나라에서 왔어요. 하늘나라 사람들이 빨리 오라고 했는데, 전 좀 천천히 가려고요. 엄마 얼굴을 오래 보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엄마, 운동 많이 하고 건강해져서 꼭 200살까지 살아야 해요.”
나는 양손의 검지와 엄지를 모아 사각형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프레임을 아이 쪽으로 향하고 입으로는 찰칵 소리를 내었다. 이걸로 지금 10초를 저장한 거야.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그러고는 떡잎 같은 자기 손도 서툴게 놀려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본다. 그 손을 내게로 향한 채 아이도 찰칵! 소리를 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모성이란 게 따로 없구나. 내 눈앞의 너였다. 매일 조금씩 자라는 아이의 안에서 나의 모성이 자라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가 비추어 주는 거울을 보며 나는 ‘대견한 모성’과 살짝 눈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