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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Sep 22. 2022

[짧툰 18화] 오늘만 산다

지금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1. 소시민인생]


 만화가 ‘키쿠치 유우키’의 <100일 후에 죽는 악어>라는 작품이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의인화 된 악어이다. 악어는 ‘평범’에도 못 미칠, 어쩌면 시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일상을 보낸다. 100일 후 죽음이 ‘예약’되어 있다는 장치만이 이 악어를 특별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이 같은 설정에 대해 알고 있지만, 정작 악어 자신은 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백미이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성실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라면을 끓여 먹고, 남는 시간에 게임을 하거나,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는 등 딱히 기억에 남을 것 없는 악어의 일상이 나열될 뿐이지만, 각 에피소드 위에 떠 있는 ‘디데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때로는 들뜨고, 가끔씩 우울하며, 대부분 감상 없는 날들이 덤덤히 지나간다. 마침내 D-0, 악어는 차에 치일 뻔한 병아리를 구하고, 흩날리는 벛꽃 속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무시무시해 보이는 죽음을 앞두고도 비장하지 않으며 ‘죽기 전 꼭 해야 할 100가지’ 따위의 버킷리스트 조차 없는 삶. ‘한낱 소시민’의 삶을 살았던 악어의 인생이 별 볼 일 없다고 말한다면… 글쎄, 사실 인생의 의미란 그저 살아내는 게 전부인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머리 위에 떠 있을 숫자는 각자 다를 테지만 알고 보면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두 달 뒤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내게 남은 날이 사실 30여 일뿐이라면, 오지도 않을 날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셈일 것이다.


[#2. 오늘만 산다]


 “요즘엔 좋은 하루보다, 별일 없는 하루가 더 고마워요.”


 나의 신경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나이가 들수록 ‘좋은 날’보다 ‘별일 없는 날’을 더 기대하게 된다고 하신다.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래를 위해 필사적으로 사는 다람쥐를 본 적이 있어요? 다람쥐는 오롯이 오늘을 살아내면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아요.” 


 내 인생은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기에 늘 불안했다. 올지도 모르는 내일을 위해 애쓰고 허우적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완성하고 싶은 것일까? 만약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난다면, 그 인생은 미완인 채인 걸까?


 악어에게 어떤 목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악어가 자신의 반려 동물이었던 병아리를 사랑했으며, 병아리를 위해 집을 지어 주었고, 끝내는 병아리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인생이었다,라고 악어 스스로 만족할지도 모를 일이다. 디데이가 정해져 있다 한들 뭐 어떠랴, 매일이 최초의 날이고 매일이 최후의 날인 것이다.


 여기, 이 순간, 내 몸짓과 언어가 일으킨 파장이 어느 날 어느 곳에 닿아 어느 사람의 빛이 된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완성형’인 삶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무용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미 아름답다면, 공연의 결말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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