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걔 되게 착해
유년 시절, 교우 관계에 있어서는 안쓰러울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당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의 특성은 ‘착하다’는 것이었다. ‘착한 친구’라는 가면은 심리적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내 유일한 생존 도구이자 무기였다. 애초에 정한 적도 없는데 이것은 언제부터인가 나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5살 즈음, ‘인싸’ 여자아이가 무심하게 떠내려 보낸 튜브를 건져 주려다 물 속에 꼬르륵 가라앉아 죽을 뻔한 일이 있다. 귀신에 홀린 듯, 갑작스레 수영장에 뛰어 드는 내 모습에 다들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왜 그랬냐고 다그치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해감 전의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그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튜브를 건져 주면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라며 속으로 우물거렸다.
환심을 사기 위해 목숨도 거는 판에 자존심 쯤이야 뭐. 6살 때는 엄마 손에 붙들려, 유치원 같은 반 여자 아이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부모님들이 찻잔을 달그락거리며 수다를 떠는 새, 그 집 딸 아이는 매번 내 손을 잡고 그녀의 방으로 날 이끌었다. 그 안에서, 아마도 그 집 부모의 방식을 따랐을 ‘훈육’을 당하곤 했다. “잘못했어, 안 했어?”라며 다그쳐 묻는 동갑내기 여자아이 앞에서 순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떨구는 시간도 고스란히 견뎌낼 줄 아는 아이였다.
아니라고 말 못하는 아이, 누구도 귀찮게 하는 법 없는 얌전한 아이. 입만 떼면 내 약점을 들킬까 두려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리 짝꿍들과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고분고분 웃어주면 적어도, ‘야, 걔 되게 착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었다. 야, 걔 되게 착해... 그런데 되게 재미없어.
“너 언제 왔냐? 있는 줄도 몰랐다.”
‘존재감 없음’을 에두른 조롱 섞인 말이 자주 들려오곤 했다. 가끔 싫은 기색이라도 내비칠 때면 거친 한숨이 돌아왔다.
“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했던 이미지랑 완전 다르네.”
이런 무시가 차츰 쌓여, 1학기 때 절친했던 친구들이 2학기가 되어서는 내 책상을 발로 쾅쾅 차기도 하는 것이었다. 왜 아침에 집 앞까지 안 데리러 왔냐, 빌려 온다 하던 체육복은 어떻게 됐냐는 등 윽박지르는 정도가 시나브로 심해졌다.
나를 안쓰럽게 여긴 몇몇 아이들이 물어오곤 했다.
“맨날 주영이 밑에서 눌려 사는 거, 힘들지 않아? 유민이랑은 또 왜 노는 거야? 니 면상 된장찌개 같다고 놀리는 애랑 말 섞고 싶어?”
‘너도 참 불쌍하다’라는 말로 대충 마무리 될 때까지, 나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러면 다들 아무 얘기 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착한 아이 쯤으로 끝나면 아예 나쁜 모양은 아니지 않나. 끝내 꺼지지 않는 그 놈의 자존심에 이따금 불길이 이는 고통만 참아내면 될 일이었다.
대학 때 어느 선배가 일침을 놓았다.
“너랑 대화하고 있으면, 벽을 보고 말하는 기분이야. 넌 무슨 인형이냐.”
선배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정곡을 가격했다. 그랬다. 나의 말과 내면 사이에는 늘 괴리가 존재했다. 겉으로만 대화를 했지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다.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과장된 나였다. 정확한 지적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 그 선배와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이후, 나 스스로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둘 단절하기 시작했다. 애써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버겁고 불편했다. 학창 시절 얕게 나마 유지되던 친분들은, 사회인이 되는 순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길 원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용납하지도 못하는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늘 불안하고 외로웠다.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여서 괴로웠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안 깊은 곳의 생각과 마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저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지만 점점 더 가까워져 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그래도 저 사람은 내 곁에 남아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