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세상이 하얘졌던 밤

기도가 처음으로 진짜가 된 순간

by 연빈

봄의 아이 연이와 겨울의 아이 빈이는
다른 듯 닮은 아이들이었다.
두 살 차이였지만, 개월 수로는 서른두 달.
그 시간의 간격만큼이나
연이는 늘 한참이나 누나처럼 보였다.


빈이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연이는 전신거울 앞에서 혼자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창 예쁜 척을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어느새 빈이가 다가와
누나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두 아이가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웃고 있길래
나는 그저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갑자기—

와장창.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전신거울이 아이들 머리 위로 그대로 떨어졌고,
거실 바닥엔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아이들은 놀라 울고,
나는 숨이 막힌 채 아이들 머리부터 확인했다.

이만한 무게가 떨어졌는데도 아이들 머리에는
기적처럼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심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로도
이 집에서 몇 번이나 심장이 떨어질 듯한 밤을 더 지나야 했다.

어느 날 밤,
빈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는데 아이가 자꾸 젖병을 밀어냈다.
방이 어두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만 품은 채
웅이에게 아이를 건넸다.

그때 웅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빈이 눈이 이상해!”

달려가 보니 아이의 눈이 뒤집히고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경기’라는 것도 모른 채 우리는 그저 미친 듯이
자고 있던 연이에게 옷을 입히고 차를 몰아 응급실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의사는 열이 있었냐고 물었다.
감기 기운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고 하자 열성경기 같다고 했다.
수액을 맞고 열이 내려가자 아이는 서서히 진정됐고,
그제야 나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끝이 아니었다. 빈이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경기를 했다.


네 살 무렵,
어린이집에서 동물원 현장학습을 간 날이었다.
밖에서 동물을 보고 실내로 들어와 닥터피쉬 체험을 하던 중,
빈이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졌다고 했다.

정말 천만다행으로 그 뒤에 서 있던 학부모 한 분이 아이를 받아주셨다고 했다.
그날도 그대로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원장님에게서 걸려온 전화기 너머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빈아, 정신 차려 봐…”

그 소리에 나는 또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웅이와 함께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도착했을 때 빈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또 한 번 살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밤을 보냈다.


그제서야 나는 어릴 적 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됐다.

나 역시 어릴 때 경기를 심하게 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젖을 먹다가 엄마 젖꼭지 반을 물어뜯은 적도 있었고,
엄마 등에 업힌 채 뒤로 넘어져 엄마를 기절할 만큼 놀라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그제서야 나는 엄마의 그 시절 심장이 어떻게 뛰었는지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생각도 조용히 자리 잡았다.

‘혹시… 이 아이가 겪는 이 일들이 나로부터 온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이어질 즈음, 나는 또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내가 세 살쯤, 아니 네 살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밥상 위에 올라갔다가 추어탕을 끓여 놓은 그릇들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나는 그 뜨거운 국물에 무릎을 데였다.

우리 부모님은 음식을 만들어 주위에 계시던 친척들과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날도 집 안 가득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일으킨 사고로 온통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의 흔적은 지금도 내 무릎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원래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는데,

꼭 그렇게 조용히 큰일을 한 번씩 치르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빈이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한듯 하다가 한 번씩 모두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아이.
아무 말 없이,
아무 예고 없이
조용히 사고를 치는 아이.

빈이는…
나를 닮은 것 같았다.


빈이의 잦은 경기로 인해 병원에서는 뇌파 검사를 해보자고 했지만,

우리는 끝내 하지 못했다.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면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날 이후로 빈이는 더 이상 경기를 하지 않았다.

정말로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그 일을 지나며 나는 아이들 열이 조금만 올라가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마가 되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닳아가는데,
셋, 넷을 키우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존경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연이는 여전히 봄 같고,
빈이는 여전히 겨울 같지만,
이제는 나란히 같은 계절을 건너고 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거울이 떨어지던 순간과
그 응급실의 밤들을
꿈처럼 떠올린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들 이마를 가만히 짚어보며
조용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PS. 연빈의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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