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그 봄, 상견례라는 관문

토끼 사건보다 더 긴장된 하루

by 연빈

그날의 토끼사건후,

웅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전화기를 내려놓아도 귓가에는 그의 웃음소리가 맴돌고,

잠들기 전까지 그날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예전에는 그냥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편하게 마음을 나누는, 그런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한마디, 한 표정이 다르게 느껴졌다.


웅이는 전보다 더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하루 일과처럼 “밥은 먹었나”, “오늘은 뭐 했노”를 묻다가 불쑥, 이런 말을 던지곤 했다.

“경아, 우리… 결혼하면 어떨까?”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뭐야~ 이게 프로포즈야?”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럴 거면 정식으로 해”라고 받아쳤다.


하지만 그런 대화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농담이라 넘기기엔, 그때마다 그의 목소리에 묘한 진심이 섞여 있었다.

웅이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 옆에 있을 때면,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온기를 찾은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조금씩 느껴갔다.


어느 날은, 만났다가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데 괜히 가슴 한쪽이 휑했다.
아직 버스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가 그리웠다.

그날 밤, 웅이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같이 눈뜨고 싶은데, 그 말이 잘 안 나오더라.”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멈춰 앉아 있었다.

장난처럼 시작된 말들이,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레 열고 있다는 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날 웅이와 통화중에,

“경아, 나… 우리 부모님한테 너 얘기했다. 결혼 얘기도 꺼냈다.”

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묘하게 긴장됐다.
하지만 며칠 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무거워졌다.

“엄마가… 형도 아직 장가 안 갔는데, 내가 먼저 가는 건 안 된다고 하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의 집안 사정이 우리 앞에 처음으로 놓인 ‘현실’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이 확실해진 지금, 그 어떤 관문도 함께 넘어설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웅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너 한 번 보고 싶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나이,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던 터라 우리 집은 “빨리 결혼했으면” 하는 분위기였지만,
웅이는 삼형제 중 둘째였다.
그의 집에선 형이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무엇보다 결정을 쥐고 있는 건 성격이 단단한 웅이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온화한 분이라 해도, 그 장벽을 넘어야만 했다.


며칠 뒤, 직접 마주한 자리.
웅이 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그 시선에 숨이 조금 가빠졌다.
그러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하게 생겼네. 잘 맞을 것 같아.”

옆에 있던 아버님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셨다.
그순간, 마음속을 눌러왔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웅이의 설득 끝에, 결국 두 분이 결혼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그날 이후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양가 부모님이 상견례를 하기로 했고, 장소는 서울 창경궁 앞 한 한식집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막상 날짜가 잡히자 설렘보다 긴장감이 앞섰다.
이 자리는 단순히 밥을 먹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 첫 관문이었으니까.


2002년 늦봄, 상견례날


햇빛이 커튼 틈 사이로 들어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연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꺼내 거울 앞에 서봤다.

차분해 보이긴 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이 어쩐지 나이 들어 보였다.

“음… 아닌 것 같아.”

옷걸이에 다시 걸고, 이번엔 하늘색 블라우스와 네이비 스커트를 입어봤다.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너무 차려입은 티가 나서 어색했다.

마치 결혼식 하객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안 나와? 늦겠다.”

거실에서 아빠의 재촉이 몇 번이고 들려왔다.

“조금만요!”

엄마는 내 옆에서 옷을 하나씩 매만지며 말했다.

“흰색 원피스 어때? 얼굴도 화사해 보이고, 괜찮은거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꺼낸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깔끔하고 단정했다.

허리에 얇은 벨트를 둘러서 살짝 라인을 잡으니, 거울 속 표정도 덩달아 단단해졌다.


택시에 올라타자 창밖으로 봄빛이 번졌다.

벚꽃이 거의 다 진 가로수에는 연둣빛 잎이 올라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걸었다.

아빠는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으면도, 손가락으로 바지를 툭툭 털었다.

엄마는 “긴장하지 말고 웃어”라며 내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착한 곳은 창경궁 앞에 있는 한식집이었다.

나무 창살과 하얀 창호지가 인상적인 건물,

문을 열자, 따뜻한 나무결과 정갈한 공기가 맞아주었다.

기억자 모양의 건물 안쪽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고,

문이 열려 있어 살짝 스치는 봄바람에 꽃잎이 나풀거렸다.


웅이와 부모님은 이미 와 있었다.

웅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그 옆에 부드러운 미소의 웅이 아버지, 단아한 분위기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아빠는 부산에서 올라온 웅이 부모님께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엔 환영과 예의가 묻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빠가 웅이를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우리 집의 식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음식이 차려지고, 자연스레 대화가 오갔다.
아빠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원래 경상도 사람인데, 서울에 자리 잡고 살고 있습니다.”
그 말에 웅이 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전라도 출신인데, 부산에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순간,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나는 웅이가 그저 부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의 뿌리에 대해선 깊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빠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 시절,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엔 알게 모르게 남아 있던 벽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들, 학교와 직장에서도 은근히 이어지던 감정의 골.

“흠…” 아빠는 생선을 바라보며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
나로서는 크게 의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빠 세대에게는 쉽게 웃어넘길 수 없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잠시 묵묵히 식사만 하시던 아빠가,
“살다 보면 고향보다 현재 사는 곳이 더 정이 드는 법이죠.”
그 한마디에 경직됐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이야기는 다시 부드럽게 이어졌다.


아빠는 웅이를 보며 말했다.
“남자답게 생겼네. 우리 딸 울릴 사람 같진 않아.”
그 말에 웅이는 조용히 웃었다.
짧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아빠식의 허락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늦은 봄바람이 살짝 불었다.


웅이 부모님은 “서울에 온 김에 창경궁이나 보고 가자”며 나를 함께 데리고 갔다.

나는 아직 시부모님도 아닌데, 괜히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길거리에 지고 있는 연분홍 벚꽃, 그리고 햇살에 반짝이는 초록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감탄사를 던지며 안절부절, 부지런히 말과 웃음을 이어갔다.


그 순간, 나는 우리 부모님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는 말없이 걸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지만, 그 눈빛엔
‘이제 정말 딸을 보내야 하는구나’ 하는 허전함과,
아직 내 품 안의 딸이 다른 집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에 대한
묘한 서운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저, 이 순간만큼은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아빠가 말없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슬쩍 웃으며 “네 아빠, 오늘 하루 종일 한숨만 쉬더라”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가 그렇게 마음이 복잡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PS. 첫 만남의 자리는 늘 긴장되지만, 지나고 나면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순간이 되죠.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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