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함께 찾아온 순간
부산 여행을 다녀온 뒤, 집안의 공기는 조금 달라졌다.
아빠는 여행 이야기를 건너뛰고, 내가 만난 사람에 대해 은근히 물어오셨다.
“그 총각, 언제 데려올 거냐?”
아직 얼굴 한 번 보신 적도 없으면서, 아빠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웅이를 자꾸 입에 올리셨다.
경상도 출신이라면 마음에 든다느니, 이야기만 듣고 성실해 보인다느니,
한 번 제대로 만나봐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피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점점 대답을 잃어가고 있었다.
친구 이상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그 감정을 확신하기에는 아직 두려웠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차가웠다.
밤마다 메일함을 열어보는 습관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했다.
웅이가 보내온 몇 줄의 서툰 문장,
거기에 덧붙은 부산 바다의 이야기와 시장 풍경 묘사가 자꾸만 내 일상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서울의 겨울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 손끝이 시려워질 즈음,
웅이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온기는 너무 따뜻해서 순간 눈앞이 붉어졌다.
그는 장난스레 속삭였다.
“경이 씨, 이렇게 아예 주머니 속에 쏙 넣고 다니고 싶다.”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말은 곧장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
겨울은 그렇게 흘러갔고,
봄이 오자 나는 마침내 그를 우리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아빠가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드디어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는 내색은 안 하셨지만, 은근히 기다리는 눈빛이었고,
나 역시 긴장으로 하루 종일 마음이 붕 떠 있었다.
현관 앞에 선 웅이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들고 온 가방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거 뭐야?”
내가 조심스레 묻자, 웅이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었다.
그 속에는 귀가 길쭉한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눈부신 흰 털 사이로 밤색이 살짝 섞여 있었는데, 낯설지만 어쩐지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며칠 전 퇴근길에 시장에 갔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안 크는 토끼라면서 권하시더라고.
근데… 보고 있는데 네 얼굴이 자꾸 겹쳐 보이는 거야.
그래서… 그냥 데려왔어. 경이 닮았다 싶어서.”
토끼가 나를 닮았다고?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웃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라,
웅이는 그곳에 토끼를 놓아두면 괜찮겠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빠도 웅이의 가방을 살짝 들여다보시더니 “귀엽구만. 저쪽에 잘 놔둬라.”
하며 직접 상자와 배추잎까지 챙겨주셨다.
아빠는 내가 어릴 적부터 마당에 새, 강아지, 물고기까지 동물을 키워오신 분이라,
토끼에게도 호의적이셨다.
웅이는 안심한 듯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식탁에 마주 앉자 아빠는 웅이를 유심히 바라보셨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시며 대화를 이어가셨고, 웅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특히 “부산이 고향입니다”라는 말에 아빠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같은 경상도 사나이네. 그 점은 맘에 드네.”
그 말에 식탁 분위기가 조금 더 누그러졌다.
식사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상자 속에 있어야 할 토끼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시선이 향한 곳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빠가 정성껏 키우시던 난초 화분과 방어풀 잎사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토끼가 뛰어올라 잎사귀를 뜯어먹은 것이다.
작은 토끼가 그렇게 할수 있다는 것에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웅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어떡하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데리고 와서…”
그는 울상이 되어 토끼를 찾으러 뛰어다녔다.
나 역시 난감해져서 아빠 눈치를 살폈다.
아빠의 표정은 처음에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화단 한쪽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토끼를 보자 아빠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한숨을 내쉬며 “에이, 동물이란 게 원래 그렇지 뭐.” 하시더니 더는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웅이는 연신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날의 해프닝은 뜻밖이었지만, 오히려 웅이의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황한 얼굴로 연신 사과하는 웅이를 바라보며, 아빠도 그 마음을 읽으신 게 아닐까.
돌아보면,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아빠와 웅이 사이의 거리마저 조금은 좁혀준 셈이었다.
PS.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그날의 토끼는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추억이 되어주었답니다.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