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첫 부산, 그리고 뜻밖의 소식

첫 여행의 기억, 웃음과 눈물이 함께한 하루

by 연빈

그해 여름,
서울의 숨 막히던 밤.

“진짜 내가 해운대 데려가줄게.”
웅이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두근거렸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가 자꾸 그려졌다.
언젠가 그 약속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번지는 어느 아침.

서울역 대합실에서 웅이와 마주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진짜 해운대 간다~”

우리는 새마을호 표를 쥐고 나란히 플랫폼으로 향했다.
철길 위로 김이 피어오르고, 멀리서 ‘덜컹’ 소리를 내며 초록색 열차가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 웅이는 가방에서 음료와 삶은 계란을 꺼냈다.
“기차 여행엔 이게 딱이지.."

나는 웃으며 계란 껍질을 까고,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회색 건물들이 멀어지고 들판이 넓어지고, 하늘이 낮아졌다.
차창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속에는 왠지 모르게 바다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곧… 부산에 도착하면 바로 해운대겠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부산역에 내리자, 공기가 달랐다.

사람들의 말투가 더 구수했고, 바람엔 소금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곧장 물었다.
“우리 지금 해운대 가는 거야?”

웅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들를 데가 있다.”

그 ‘잠깐’이 나를 자갈치시장으로 데려다 줄 줄은 몰랐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비릿한 바다 냄새와 사람들의 호객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아가씨, 광어 한 판 보고 가이소~!”

“이 장어 봐라, 싱싱하데이~!”

양동이 속 생선들이 펄떡이며 튀고, 손질하는 칼질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바다보다 먼저 만난 부산의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여긴 왜 온 거야…?”

웅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부산 오면 여기 구경은 해야지. 그리고 오늘 점심은 장어다. 스태미너 음식이라 안 하나~”

그 말과 함께 그는 장어 수조 앞에서 팔을 번쩍 들며 장어 흉내까지 냈다.

사람들이 웃고 지나갔지만, 나는 웃음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여자 마음을 이렇게 몰라도 되나…’


시장 골목을 빠져나와 장어집에 들어서니, 숯불 위에서 장어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양념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었다.

웅이는 젓가락으로 장어 한 점을 집어 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먹어봐라, 힘이 불끈 난다.”

나는 억지로 한 점 삼키며 웃었다.

“다음엔 바다 먼저 가자.”

“알았다, 알았다~”웅이는 장난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해가 저물때쯤 되서야 우리는 해운대에 도착했다.

모래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파도 소리는 잔잔했다.

낮 동안 품었던 설렘은 반쯤 식었지만,

웅이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이 평범한 풍경마저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얼굴로 흩날리자, 웅이가 손으로 살짝 넘겨주었다.

그 순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산에서의 하루는 너무 빨리 흘러갔다.

마지막 기차 시간이 다가와,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부산역으로 향했다.

밤 8시 30분, 서울행 새마을호에 올랐다.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차창에 비친 불빛이 반짝였다.


웅이는 피곤했는지 옆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창밖으로 스치는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집 전화 번호였다.

“경아…”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순간, 손에서 힘이 빠졌다.


외숙모.

어릴 적 나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열이 높아 숨이 가빠오고,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경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외숙모는 누구보다 먼저 내 곁에 달려왔다.
바늘로 손끝을 찔러 피를 빼주고, 따뜻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며
“괜찮아, 괜찮아…” 하며 숨을 고르게 해주셨다.
몇 번이나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 나에겐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이었다.


그런 외숙모가 작년에 갑자기 쓰러지셨다.
늘 건강하시던 분이라 가족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자주 병문안을 다녔고,
외숙모의 손을 꼭 잡으며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시길 바랐다.

하지만 끝내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플랫폼을 나서자,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파고들었다.

“택시 타고 바로 가.”

“인천까지 가야 하잖아, 너도 조심하고.”
나는 억지로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웅이는 인천행 택시를 잡아타고, 나는 집에도 들르지 못한 채
곧장 장례식장 주소를 기사님께 전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불빛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외숙모는 우리 곁을 떠나셨고,

나는 아직도 따뜻한 손길과 “괜찮아”라는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외숙모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리며 목이 메어왔다.


며칠 뒤,

저녁을 먹다 말고 아빠가 나를 불렀다.

“니… 요즘 전화 많이 하는 그 친구 있지?”

“웅이?”

“남자는 남자가 봐야 안다. 데리고 와라. 내가 한 번 보자.”

그 순간, 젓가락을 쥔 손끝이 멈췄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내 하루를 채우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마음이 분명한 선을 긋지는 못하고 있었다...


PS. 서울의 여름이 뜨거웠던 만큼, 부산의 바다는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네요.

그렇게, 두 도시의 계절이 처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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