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선풍기와 아버지의 한마디
서울역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이후,
우리는 매일 밤 통화를 했다.
딱 한 번의 채팅, 그리고 1년간의 이메일.
그 후로는 매일… 전화기 너머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휴대폰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제한 요금제는 없던 시절.
밤새도록 통화하기엔 요금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늘 유선전화를 붙잡고,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전화기를 어깨에 끼운 채 엎드려 있거나, 선풍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게 하루의 끝이었고,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경상도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경상도 출신이었고, 목소리가 크고 억양이 강했다.
그냥 하는 얘기인데도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들려서,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호랑이 아저씨’라 부르곤 했다.
집 안에서도 아빠의 목소리가 울리면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는… 절대 경상도 남자는 안 만날 거야.'
그런데, 웅이가 경상도였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어른들이 그런다.
딸은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고.
그 말을 나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서울의 밤은 숨 막히게 더웠다.
창밖에선 매미가 밤늦게까지 울어댔고
내 방은 바람 한 점 없었다.
“아… 진짜 너무 더워…”
나는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넘기며 전화 수화기를 어깨에 끼웠다.
책상 옆 탁자 위,
유선 전화기에서 뻗은 구불구불한 선은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서울은 원래 그렇게 덥나?”
웅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말을 할수록, 말투도 바뀌어갔다.
어색하게 존댓말을 쓰던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반말...우리는 동갑이니까..
“아니야. 근데 오늘은 진짜 숨막히게 더워…”
나는 한 번 창문을 열었다가
대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다시 닫아버렸다.
그리고 선풍기 바람을 얼굴 가까이로 쐬기 시작했다.
뜨겁긴 했지만, 그나마 숨이 좀 쉬어졌다.
“그럴 거면 그냥 인천에 와. 바닷바람 맞으면서 자면 얼마나 시원한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인천.
웅이가 지금 사는 도시.
그리고 그의 고향, 부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바다들.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곳은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곳일 것만 같았다.
“진짜… 갈까?”
나는 장난처럼 웃으며 말했다.
“진짜와봐. 내가 인천 앞바다도 보여주고, 언젠간 해운대도 데려가줄게.”
웅이는 늘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마음을 간질였다.
그날도 우리는 그렇게 무더운 서울과 인천, 그리고 그의 고향 부산 사이를
웃음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가 눈을 부릅뜨고 들어오더니
손가락으로 선풍기를 가리키며 목청껏 외쳤다.
"경이..니~"
“창문 닫고 선풍기 틀고 자면... 죽어!! 죽어!!”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채
선풍기를 급히 껐고,
수화기도 귀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헉… 아빠 통화중인데…”
방문은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웅이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죽는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그게… 우리 아빠가 진짜 믿거든. ‘선풍기 사망설’이라고…
문 닫고 선풍기 틀고 자면 질식해서 죽는다는…”
웅이의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서울엔 괴담도 스펙터클하네…”
나도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엔 어쩐지 창피함이 따라왔다.
그냥 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고 있었을 뿐인데…
그 장면을 웅이에게 들켜버린 것 같아서 괜히 민망했다.
그날 밤,
나는 선풍기를 다시 켜지 못했다.
창문도 닫힌 채,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웅이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며칠 뒤,
메일함을 열자 웅이에게서 새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제목: 선풍기 괴담 과학적으로 반박합니다 ㅋㅋ]
메일을 열자
흑백 스캔 이미지가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신문 기사였다.
《선풍기 괴담, 전문가 "근거없다"》
기사엔...
문 닫고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얘기는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괴담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웅이의 짧은 메시지가 이어졌다.
경아~
선풍기 틀고 자도 진짜 안 죽는댄다ㅋㅋ
다음에 전화할 땐 창문 닫고 선풍기 틀어도 돼.
(단, 아버님 앞에서는 조심하자… 우리 둘 다 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나는,
네가 덥다고 말하던 그 여름밤이 자꾸 생각나.
그날 서울은 바람 한 점 없었지…
근데 이상하게,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그 밤이 훨씬 시원했을 것 같더라.
—웅이가
나는 모니터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덥고 창피했던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웃음으로 감싸주는 사람.
그게 웅이라는 사람이라는 게,
참 고마웠다.
그 여름은,
기온 때문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뜨겁게 달아오르던 계절이었다.
부끄럽고 어색하고, 때론 답답했던 그 시절.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름 이후로
선풍기를 틀며 창문을 열지 않았다.
PS.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더운 여름밤이 우리 사랑의 첫 계절이었네요.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