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서울역 첫만남

1년의 기다림 끝, 설렘으로 마주한 순간

by 연빈

딱 한 번의 채팅, 그리고 그 후 1년간의 이메일.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목소리도 모른 채로 글로만 이어졌다.

서울녀 경이와 인천 사는 부산남 웅이로…
주고받는 메일은 주로 일주일에 한두 번.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 하루에 작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메일함에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뜰 때마다,
나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짧게는 “오늘 점심에 회덮밥먹고 부산 생각이 많이 났어요.”
길게는 “주말에 사촌형 부부랑 인천항에 다녀왔는데, 고향 바다랑은 또 다른 색이네요.”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일기처럼, 편지처럼 쌓여갔다.


웅이의 메일엔 늘 바다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파도 소리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메일을 읽는 순간 내 방 안에 번져왔다.


나도 답장을 보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첫눈이 내리던 서울 거리,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인사동 골목의 풍경,
엄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의 따끈한 맛을 글로 적어 내려갔다.

그는 “서울의 눈은 마치 영화 속 장면 같다”거나
“된장찌개에 고향 밥 한 그릇이면 최고겠다” 같은 말을 덧붙이며
내 일상의 조각들을 함께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메일함이 한참 동안 비어 있었다.

며칠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보름이 되고,
결국 한 달이 가까워졌다.


처음엔 ‘바쁘겠지’ 하고 넘겼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 날이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메일함을 열어보고,
점심시간에도 슬쩍 확인하고,
퇴근후 집에와서 습관처럼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매번, ‘새 메일 없음’이라는 차가운 문구만 눈에 들어왔다.


서운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지,
아니면 이미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편지가 있는 건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관계가 허공에 흩어져 버린 것 같아 마음속에서 작은 허전함이 뚜렷해졌다.

‘이제 이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스스로 다독이듯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으려 할 즈음—


어느 저녁, 갑자기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컴퓨터를 바꾸는 동안 메일을 보낼 수가 없었어요 혹시… 기다렸나요?”

그 문장에 괜히 웃음이 났다.

기다렸냐고?

기다린 건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함을 열어본 사람이 나였다.


그 뒤로 다시 메일이 오갔고,
몇 달 후, 내 생일이 다가오던 날이었다.

‘띵동’ 하고 배달된 작은 레떼, 그 시절 유행했던 그림 편지였다.

보낸 사람 칸에는 그의 이름.
안에는 짧은 손편지 같은 글씨와 예쁜 생일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합니다
이제는… 직접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 한 줄이, 결심을 이끌어냈다.
메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마음.
우리는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채팅으로 처음 인사를 나눈 지 정확히 1년이 되던 해 여름—
그 약속이 현실이 되는 날이 왔다.



2001년 여름 서울역 정문 앞.


서울역,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출입구 앞.
나는 단 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말그대로 '서울역에서 웅이찾기!'

우리는 약속했다. “옷차림으로 알아보자.”

그 단서 하나만 믿고, 나는 낯선 얼굴들 사이를 5분 넘게 서성였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심장은 쿵쾅거리며 점점 더 초조해졌다.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누군가는 나를 흘끗 보고, 누군가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무심히 흘깃 보는 시선들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 경이… 씨?”

낯설지만 기다려온 그 목소리에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얼굴, 모르는 목소리.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은 콩 하고 울렸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수더분했고, 예상보다 더 수줍어 보였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더… 다정해 보였다.

첫눈을 마주친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 이 사람과는 뭔가 시작될 것 같다.’


“우리 밥 묵… 아니, 먹으러 갈래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투리를 누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억양을 감추려 애쓰는 모습이 어딘가 귀엽게 느껴졌다.


“네… 지하철 타고 종로 쪽으로 가요. 좀 걷다가 괜찮은 데 있으면 들어가요.”

그렇게 우리는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종로 3가로 향했다.

대화는 자주 끊겼고, 엉뚱한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함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종로 3가에 도착해 인사동 거리로 접어들자 길거리에 부채, 기념품, 전통 찻집, 구경거리가 많아졌다.

그는 작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분홍색 손거울을 하나 들고 말을 고르듯 입을 열었다.

“이거… 경이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났다. 서울말을 쓰려고 애쓰면서도 끝에 자꾸 튀어나오는 사투리.

그게 참, 웅이스러웠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 거울을 계산했다.

“기념으로요… 오늘… 첫 데이트니까…”


조금 더 걷다가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수제비 좋아하세요?”

“수제비… 요? 예, 저는… 아주… 좋아지… 요”

“저 인사동에 진짜 좋아하는 항아리 수제비집 있어요. 거기 가도 돼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죠… 경이 씨가 좋아하는 곳이면… 저도… 좋습니…다…”

나는 웃으며 앞장섰다.


가게는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 낡은 간판, 한옥 느낌이 나는 천장,

벽면엔 단골들의 이름이 적힌 작은 항아리들이 진열돼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고소한 들깨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저 들깨수제비 진짜 좋아하거든요.” 내가 먼저 메뉴를 골랐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와… 저도 그거 좋아합니…더…아…아니, 좋아해요. 하하…”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아니에요. 그 말투도 귀여워요. 그냥 편하게 말해요.”

그는 얼굴이 살짝 빨개지더니 수저를 정리하며 말했다.

“경이 씨 앞이라서… 괜히 잘하고 싶어서…서울말 쓰면… 좀 더 나아 보일까 싶었거던…요…”

그 순간,나는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우리는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겨우 몇 시간이었는데도 헤어지기엔 너무 짧은 하루 같았다.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길... 둘 다 말이 줄었다.

대신, 걷는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요… 또 봐요…”

우리는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날 밤, 헤어진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웅이였다.

“그… 저기…그냥… 목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어서…요…”

나는 웃었다. 그리고,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PS. 서울역의 복잡한 사람들 사이, 우리 둘만의 계절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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