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천리안 채팅, 첫 인연의 시작

2000년대, 이메일로 싹튼 첫사랑의 기억

by 연빈

나는 1남 1녀 중 막내로, 서울 성북구에서 태어났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따뜻한 보통의 가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늘 조용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우울한 건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떠올리면 “항상 웃는 사람”이라고 했다.
웃음은 나를 세상과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언어였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 앞에서 그 꿈을 접었다.
“여자는 일찍 직장 잡아야 한다”는 단호한 말에
나는 곧바로 사회로 나왔다.


첫 직장은 강남의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아침 7시,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며 출근길에 올랐다.
하루 왕복 3시간, 그렇게 6년을 다녔다.

그러다 포기하지 못한 학업의 꿈을 향해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다행히 변호사님의 배려로 수업이 있는 날에는 조금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IMF가 몰아친 그 시절, 사무실은 직원을 감원해야 했고 나는 1순위였다.

그때 변호사님의 사모님이 나를 불렀다.
그분은 유치원 원장이었고, 나를 보조교사로 다시 채용해 주셨다.
그 덕분에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6개월도 되지 않아 건강이 무너졌다.
결핵 진단을 받고, 젊음의 한 계절을 병원과 집 사이에서 보내야 했다.


회복 후 다시 일을 구했지만, 세상은 예전보다 더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 사이 나이는 20대 후반을 향했고, 친구들은 결혼해 아이를 키우며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전화 한 통조차 뜸해졌고, 대화의 주제는 서로에게 낯설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복사된 듯 흘러가던 어느 날, 문득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몰라도 좋았다.
그저 내 하루 속에 다른 온도가 스며들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작은 채팅창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인생의 다음 계절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2000년 어느 여름 밤.


그날 밤,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천리안 채팅’ 아이콘을 눌렀다.

삐~~
익숙한 접속음.. 작은 창이 열리고, 수많은 대화방 목록이 스쳐 지나갔다.
유난히 따뜻해 보이는 방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이야기 나눠요”

별 생각 없이 클릭했는데,

그 방은 한 남자가 만든 자리였다.

2000년대 초, 채팅방에 들어가면

화면 한쪽에는 사람들의 닉네임이 길게 줄지어 있었고,

누군가는 ‘ㅎㅇ’ ‘방가’ 같은 짧은 인사말을 남기며 들어오고 나가곤 했다.

글자 색도 제각각이라,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신이 없을 때도 많았다.


그날도 화면 위아래로 대화가 빠르게 올라갔지만,

내 눈길은 유독 한 닉네임에 머물렀다.

이름 옆에 ‘부산남자’라는 소개가 붙어 있었다.

그때 그는 실제로 인천에 살고 있었지만, 태생이 부산이라 그렇게 적어둔 거였다.

닉네임만 봐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 시선이 갔다.

그는 채팅창 가운데에 길게 글을 남기는 대신,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잠시 후, 한 줄의 쪽지가 도착했다.

글자색은 단정한 검정, 끝에는 점 하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사람인데 인천에 살아요”


부산?

화면 속 글자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서로 다른 도시, 서로 다른 삶.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한 줄 속에는 낯설지 않은 온기가 스며 있었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웃음 이모티콘을 날리고 있었지만,

그 순간 나는 다른 모든 글자를 흘려보냈다.

내 눈에는 그의 말만 또렷하게 들어왔다.

마치 소란스러운 시장 한가운데서, 유독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순간처럼.


그는 곧바로 또 한 줄을 보냈다.

“혹시… 나이 여쭤봐도 돼요?”

잠시 고민하다가 나이를 적어 보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후, 화면에 그의 답변이 떴다.

“아, 우리 같은 해네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동갑이라는 건 참 신기한 힘이 있었다.

보이지 않던 벽이 갑자기 허물어지고, 말 한마디가 훨씬 가깝게 다가오는 기분.


그런데 곧 이어진 말은 나를 웃게 했다.

“그래도 내가 오빠죠 생일이 빠르거든요”

순간, 모니터 속에서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분명 동갑인데, 한 살이라도 많은 듯 굴고 싶은 사람.

그 얄밉지만 귀여운 태도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장난기 속에 묘한 듬직함이 스며 있어, 마음 한구석이 살짝 따뜻해졌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이 서로의 하루와 취향을 짧게 나누었을 뿐이었다.

“혹시… 이메일 쓰세요?”

그는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시엔 휴대전화도, 메신저도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연락처를 주는 건 망설여졌지만,

왠지 이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짧게 주소를 적어 보냈다.

그는 ‘내일 메일 보낼게요’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그 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채팅창에서 만나지 않았다.

대신, 이메일이 우리 둘의 작은 통로가 되었다.

하얀 화면 속에 한 줄씩 채워지는 안부와 일상의 조각들.

그렇게 우리 이야기는, 모니터 속 작은 창이 아닌 편지 같은 메일 속에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짧은 대화가,

이후 내 인생을 바꿔놓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PS. 그 후, 우리의 이야기는 메일 속에서 이어집니다.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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