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흑역사, 잊지 못할 밤
상견례가 끝난 뒤, 우리 둘은 이상하게 더 편해졌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가족을 직접 본 그 하루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현실로 끌어당긴 것 같았다.
며칠 후, 웅이네 집에서는 우리 둘의 궁합을 봤다고 했다.
“둘이 동갑이라 가끔 부딪치긴 하겠지만, 결국 잘 살 팔자래.”
웅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
2002년 11월.
그해 여름,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월드컵이 있었다.
“대한민국~!” 붉은 티셔츠를 맞춰 입고, 우리는 거리 응원에 나섰다.
사람들 틈에 끼어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경기에서 골이 터질 때마다 웅이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렸고,
그 순간의 함성과 열기가 우리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우리도 저 선수들처럼, 끝까지 같이 뛰자.”
웅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0월이 되었다.
웨딩촬영을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내 친구가 추천한 스튜디오 있는데, 거기서 찍자. 사진 진짜 잘 나와.”
그렇게 웅이의 고향 부산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촬영 당일 아침, 부산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바람마저 살짝 달콤하게 느껴질 만큼, 모든 게 특별해 보였다.
평소 화장을 거의 하지 않던 내가 메이크업을 받고 드레스 피팅을 마쳤을 때,
웅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잃고 나를 바라봤다.
“와…경이 맞아? 진짜 예쁘다.”
그 짧은 한마디에,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있었다.
괜히 시선을 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동안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 속에서도, 오늘만큼 그의 눈이 반짝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촬영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웃어야 하는데 입꼬리는 굳어만 가고, 드레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포즈는 자꾸 어색해서 사진사 말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서도 속으론 ‘이게 맞나’ 싶었다.
무엇보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탓에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햇볕 아래에서 웃다 보니 입술이 마르고, 드레스 속 등줄기는 땀으로 젖어갔다.
촬영이 끝날 즈음엔, 온몸이 힘이 빠져 의자에 푹 꺼져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든 하루였지만 그의 눈길이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피곤함 속에서도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그날 저녁, 웅이의 친구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라 몸도 지쳐 있었지만,
웅이가 “오늘은 다 같이 한 잔 하자. 너도 내 친구들 제대로 알면 좋잖아.”라며
웃는 얼굴로 권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식당 안은 이미 웅이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부산 사투리로 가득했다.
우리를 보자마자 “사진 찍은 거 잘 나왔나?”라며 반갑게 맞아주었고,
그 따뜻한 분위기에 나도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문제는 술이었다.
나는 평소 술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 아빠는 술을 정말 좋아하셔서 식사중에 항상 반주를 즐겨하셨다.
그모습이 싫었는지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히 웅이도 술을 즐겨하지 않아서 연애때는 거의 영화나 공원등 구경을 많이 다녔었다.
그런데 오늘은 거절할수 없는 날이었다.
친구들이 “오늘은 축하 자리다, 한 잔만 해라” 하며 연신 잔을 채워주었다.
빈속에 들어간 첫 잔은 의외로 부드럽게 넘어갔고, 그게 오히려 방심을 불렀다.
“자, 이번엔 우리 다 같이 건배하자!”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 순간부터 세상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친구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웃어야 할지,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느리게 굴러갔다.
손끝이 뜨겁고, 귀 안쪽이 울리는 느낌.
어쩌다 한 번씩 고개를 끄덕였지만, 점점 목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원래는 2차, 3차까지 갈 계획이었지만, 내 상태를 본 웅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얘는 술 잘 못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느껴졌고,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다음 기억은… 없다.
마치 필름이 툭 끊겨버린 것처럼.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옷차림이 달라있었다.
그리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
웅이가 식탁에서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나는 식사 자리에서 완전히 취해버렸다고 했다.
웅이는 내가 조용히 잘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부모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현관문을 살금살금 열고 발걸음을 최대한 조심히 옮겼다고 한다.
방 문을 살짝 열어 나를 눕히려는 순간, 갑자기 위에서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잠깐만…!”
웅이가 나를 부축하는 사이, 그대로 그의 어깨에 토를 해버린 것이다.
그날 내가 입고 있던 원피스와, 웅이의 셔츠가 동시에 엉망이 됐다.
당황한 웅이는 나를 급히 이불 속에 눕혀두고, 젖은 옷을 들고 부엌 옆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에 옷을 담그고, 세제를 풀어 조심스레 비비고 있었는데—
그때 뒤에서 들려온 낮고 단호한 목소리.
“아들… 뭐 하니?”
순간, 웅이의 등줄기를 식은땀이 타고 내려갔다고 한다.
화장실 문가에 서 있던 어머니의 표정은 놀람과 당황, 그리고 살짝의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웅이는 최대한 침착한 척하며 “아… 그게… 경이가 원래 술을 못하는데, 오늘은 좀…” 하고 얼버무렸다.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그 젖은 셔츠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셨다고 했다.
그 짧은 순간이 웅이에겐 한 시간이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냉장고에 쪽지를 붙여 두고 가셨다.
‘냉장고에 콩나물국 끓여놨다. 속 풀고 가라. 근데 여자가 술을 너무 마시면 안 된다.’
쪽지를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화와 걱정이 뒤섞인 그 한 줄이, 어머니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과 감사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집안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작은 종이에 그날의 상황과 사과의 말을 빼곡히 적어 부엌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다시는 술로 폐 끼치는 일 없겠습니다.’
그 다짐과 함께, 웅이와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부산의 바다가 유난히 반짝였다.
그날 이후, 나는 술자리에선 물잔만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웅이가 그날 일을 종종 꺼내 놀린다는 거였다.
“경아, 그때 기억 안 나지? 내가 너 데리고 집에 들어갈 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 얘기 하지 마!” 하고 막았지만, 이미 그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정말 웃기고 싶은 듯, 가끔은 친구들 앞에서도 슬쩍 꺼내려고 해서 진땀을 뺀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기억을 더듬어도, 그날의 장면은 내 머릿속에서 온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비어 있는 필름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혼란스러운 밤에 나를 챙기고, 곤란한 상황에서 나를 지켜준 웅이의 모습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어깨에 묻은 술 냄새와 시선이 따가웠을 그 순간에도, 그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안아주고, 민망한 기억을 웃음으로 바꿔버렸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사람과의 결혼 생활은, 웃음과 따뜻함으로만 채우고 싶다.’
PS. 그날의 부끄러움은 오래 기억에 남았지만, 진짜 가족의 시작이었습니다.
연빈의 여정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