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인류애 회복한 it회사 인턴의 가을일기
가끔 나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근 10일 정도는 그런 시기였다. 환절기에 맞이하는 독감처럼 극도로 별로인 사람이 되어 가는 나를 스스로 바라봐야 할 때, 그 괴로움을 안고 한 없이 밑바닥으로 파고들 때가 있다.
휴학 전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교양 수업 중에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것들을 배우는 과목이 있었다. 그중에 한 가지 방법이 ‘불행의 원인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 것’이었다.
지난 10일간은 내 불행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을 미워해보려고 애썼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내 어이없는 노력하는 나를 다시 돌아보고는, ‘아 나는 외부 원인만 찾아 불평을 늘어놓는 구제불능의 사람인가’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외부 원인을 모두 없애면 될 것 같았다. 지금 주위의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괜찮아질까? 나를 모르는 사람들만 있으면 내가 다시 잘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들을 가지고 더 싫어해보려고 노력했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견딜 수 없이 분노했고 뱉어냈다. 결국 나는 행복해지려다가 이 불행을 가지고 동굴 속으로 자꾸만 들어갔다.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직장동료 L과 S와의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일 하는 파트는 달랐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mbti 검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고, 영화 취향이 비슷했다. 또 책방과 여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누구는 infj라서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고, 누구는 enfj라서 어떻더라-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성격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내 성격의 고질적 문제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가끔 좋은 사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너무 좋아져 버리면 어쩌지’, ‘나는 어차피 떠나야 하는데, 저 사람들 덕분에 여기를 떠나기 싫어지면 어떡하지’ 이것이 내 성격의 고질적인 문제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L은 격하게 공감을 해줬다. 평소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고민까지 함께 공유한다니 행복했다. 굉장히 반가웠고 고마웠다.
이 이야기로 또 한참을 떠들다가, 카페가 닫을 시간이 되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는 똑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던 중, S가 말했다.
“연과 L이 떠났을 때 이 사람들이 그리울까 봐 걱정하는 것보다, 남겨진 사람들이 여러분의 빈자리를 봤을 때 느끼는 공허함이 더 크지 않을까요?”
심장을 콕콕 찌르는 말을 한마디 들어버렸다. 떠난 나보다 남겨진 사람들이 더 아파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에게 왜 위로가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남겨질 그 사람들을 다시 걱정하겠지. 하지만 오늘은 잠시 사랑받고 있었다는 행복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는 떠날 사람이니까 저 사람들을 사랑하지 말아야지’와 같이 어리석은 다짐을 반복한 하루였다. 저 말을 들은 순간 이제 저 다짐을 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나? 죽도록 미워할 사람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고, 나는 그 사람들 만나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데.
오늘을 보내며 깨달은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 불행의 원인을 굳이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자. 내부적으로 소진하는 것보다, 외부에서 찾는 것이 더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일 수 있다. 이론보다는 나의 기준에 맞추자.
둘, 함부로 뒷이야기를 하지 말자. 지금까지 돌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뒷 이야기를 하면 돌아오는 것은 불안과 찝찝함 뿐이었다. 어차피 나는 ‘ 떠날 사람’이니까, 남겨질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자.
셋, 잘 모르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으로 두자. 어차피 평생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니까. 그도 나를 모르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에 집중하자.
마지막,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여름 일기에서도 다짐했던 것이지만 또 간과해버렸다. 하지만 이만큼 행복해지는 것도 없을뿐더러 가장 쉬운 방법임을 깨달았다. 잊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기고 돌보고 사랑하자.
집에 와서 누우니 선선한 공기가 창을 타고 살랑거린다. 미련인 듯 불어오는 여름 바람을 이제 보내줘야겠지.
그리고 짧고 굵었던 나의 유용한 열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