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머문, 필연적인 문장들

양지원의 개인전 <자라나는 드로잉>, (더빌리지, 서울, 2018)

by 연두


쓰인 단어들, 잘려나간 듯한,
불완전한 문장들은
하나의 개체가 되어 기록한 주체에게 다시 말 걸기를 시도한다.
개체들은 서로 정리되고 연결되어
본래 쓰인 때와 다른 생명력을 가지며
영역을 확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작업 노트 안의 쓰인, 그려진 것들은
여전히 그 안에서 묵묵히 때를 기다리거나,
밖으로 나오기 위해 대기 중이고
또는 그저 기록되어 있다.

자라나는 드로잉, 양지원 작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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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원의 개인전 <자라나는 드로잉>, (더빌리지, 서울, 2018)은 4평 남짓한 쇼윈도 형태로 되어있는 공간에 잠시 머물고 떠난다. 이 ‘잠시’라는 시간을 위해 작가는 그보다 곱절이 많은 시간 동안 그 주변 일대를 다니며(walk), 관찰(observe)하고, 수집(collect)한 문장들을 3면의 벽에 흔적을 남기다가 다시 지우는 행위(act)를 한다.(각주1)
양지원은 ‘왜?’ 열흘이 지나면 다시 덮어야 하는 벽을 드로잉 화면으로 선택한 것일까.

이전 작업을 들춰보면 작가의 관심은 일상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함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한 대상을 시간차를 두고 관찰하는데, 수집한 대상이나 사물들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분류/나열하지도, 조형적으로 세련되게 구성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수행하듯 발견한 외부의 세계를 자신의 내밀한 공간 안에 2) 옮겨놓기 위한 관찰과 수집,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를 기록할 뿐이다. 이러한 행위는 <수동산책>(2014)에서 전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업은 2013-2014년 사이 청주 수동에서 머물면서 발견한 씨앗이나 일상에서 직접 채집하여 발아시킨 식물을 옮겨 심는 과정을 드로잉이나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수집했을 씨앗들과 발아한 식물을 다시 그 자리에 둠으로써, 물질 그 자체는 원래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즉,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형체들, 이것을 발견하는 내적 사유와 시간을 탐색한 것으로 작업의 행위를 마친다.

그 뒤로 이어지는 개인전 <탑, 씨, 꽃꽂이>(2017)은 작가의 작업적 태도가 단순히 외형의 조형성이나 형태의 수집과 관심에서 그치지 않고 각 사물이 가진 중의적인 성질을 찾아내고, 다층적인 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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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보름달을 보았다.
나는 블루베리 케이크 한 조각을 샀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좀작살나무 열매를 보았다.
나는 건강을 위해 매일 아사이베리를 먹는다.
나는 이 모든 원형을 매우 좋아한다.

일상의 원형질_2017


<일상의 원형질>(2017)의 글에서 밝히듯 일상 속에서 발견한 ‘원형’은 양지원이 반복적으로 발견한 사물이 가진 익숙한 형태이며,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형상이다. 비록 작가는 의도적으로 ‘원형’ 그 자체에 대해 파고들지는 않았으나, 우연히 혹은 자연스럽게 발견하거나 수집하게 되면서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원(圓)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계 속에서 순환하는 모든 움직임과 영원함을 상징하는 도형이다. <수동산책>(2014) 통해 수집한 열매, 씨앗을 비롯한 ‘생명의 순환’과 관련된 자연물의 관심과 <탑, 씨, 꽃꽂이>(2017)의 일련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수집하고 본뜬 돌의 형태가 가진 ‘원’을 비롯하여 ‘원형질’에 대한 텍스트까지- 양지원이 일상에서 ‘원형(圓形)’의 형태를 찾는 시도 혹은 그 닮은 것들을 수집하고 그가 낯선 사물과 공간에 접촉하는 방식은, 그 원형(原形)에 가까워지고 그 본질 그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돌아가 이번 전시 <자라나는 드로잉>(2018)에서는 본인이 지금까지 작업 노트에 쓰거나 그린 것들, 쌓거나 묵혀두었던 드로잉과 텍스트를 전시장 벽면에 불러온다. 최소한 것만 남기고 다시 지우는 현장작업으로 이어지는 월드로잉은 작가에게 가장 익숙하고, 접해본, 가장 편한 표현 매체이다. 가장 먼저 그리기를 하였고, 그리기에서 쓰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나 그리기도 쓰기도 마지막에는 흰 페인트로 전부 덮어진다. 마치 원의 시작점과 끝점이 같은 도돌이표 같은 이 고독한 작업은 사진이나 인쇄물로 기록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라진 것에 대한 필사(筆寫)일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행위가 모래 해변 위에 나뭇가지로 그린 흔적들이 파도가 한번 휩쓸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모래사장 위에 어떤 것을 쓰거나 그린다. 파도가 한 번 휩쓸면 다 지워질 문장들은 결국 그 행위를 함으로써 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이 아닌 기억에 담고 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양지원의 ‘행위’들이 겹쳐 보이고, 그의 ‘행위’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어떤 말이자 문장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빈 페이지 안에 어떤 것을 쓰고, 덮고, 그렸는지 톺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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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장 : 출발_집과 사람 드로잉


양지원은 지금까지 쌓아놓은 작업 노트에서 발췌한 드로잉/텍스트 중, 더빌리지 벽면에 가장 처음 그린 드로잉은 가슴에 둥근 구멍이 뚫린 사람과 집의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작가의 작업 노트에 초반부터 등장한다. 필자는 이 드로잉을 마주하면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저서 <공간의 시학 (La Poetique De L'Espace)>에서 ‘집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3)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인간의 내밀한 공간인 ‘집’과 사물을 담는 서랍, 상자 등 공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평온함을 주며 자신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게 하며, 어떤 공간에 감싸듯이 들어있을 때 평온함이 있는 내적인 공간에서 상상력의 성질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이 상상력의 궁극성은 ‘요나 콤플렉스’ 즉 우리가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는 동안 무의식 속에 형성된 원형적 이미지(=원형론)를 의미한다. 결국 바슐라르는 문학과 예술을 접했을 때 심미적인 체험을 받아들이는 상상력의 본질은 인간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미시적인 공간과 세계의 공간이 안과 밖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원초성을 알아보게 할 수 있는 도구임을 밝힌다. 의도치 않게 양지원은 인간의 상상력이 담긴 집과 원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의 몸통 드로잉은 마치 바슐라르의 문장이 이미지로 도상화된 듯 보였다. 이는 우연히 마주치는 대상을 끌어들이는 필연적 존재로 만드는 양지원의 작업 세계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첫 문장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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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장 : ABOUT /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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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은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완전하지 않은) 상태나 정도임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작가 이 단어를 통해 본인이 그동안 관찰한 나무에 대한 단상들과 연결한다. 단어 아래 3으로 끝나는 숫자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의 현재 수령을 뜻한다. 이것 또한 명확한 나이가 아닌 ‘약’이라는 모호함으로 숫자를 매긴다. 우리가 아는 것들이 분명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리기에서 단어로, 단어에서 문장으로 넘어가며,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조사하고 기록한 회화나무와 노거수의 관련 이야기를 쓰고 지운다. 노트에 쓰고 지운 단어와 문장, 그리고 그리기가 전시 벽면에 채워지고 지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무’는 결국 새로이 만난 공간과 익숙해지기 위한 필연적 매개가 된다.


마지막 문장 : Tomb(무덤)/Womb(자궁)


작가는 두 단어가 가진 어원이나 유래에 대한 분석보다는 두 단어의 형태와 발음의 유사함을 느끼면서 ‘단어 그리기’를 시작한다. 이는 놀이하듯 조합하거나 생략하는 등 ‘형태 그리기’이기도 하다. 자궁은 사람(생명)의 시작점이자 첫 집이라면, 무덤은 육체의 끝이자 영혼(망자)이 재탄생하는 자궁이자 사람(생명)의 마지막 집으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원-원형-자궁-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스스로 원형의 문장, 응집된 문장이 되어간다.


단락의 마무리, 그리고 숨고르기


전시장 안의 벽에 그려질 것들은 전시 기간 동안 보이고 단지 기록된 후 한 겹 덧발라져 사라져 보이게 될 것이다. 노트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낸 재료들은 벽 위에서 발화가 되거나 다른 것으로의 발아가 될 것이다. 벽을 마주한, 그려질 것들을 기대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자라나는 드로잉, 양지원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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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드로잉>은 새로운 발아를 꿈꾸며 ‘결론’이 아닌 문장의 한 단락을 ‘마무리’한다. 이 두 단어의 마침표라는 결이 비슷하지만, ‘결론’은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뜻이라면, ‘마무리’는 어떤 일이나 글을 끝맺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을 위한 준비로도 볼 수 있다. 즉 이번 전시는 한 권의 책의 한 단락이 끝나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기 전 빈 페이지와 같다. 비어있지만, 다음 단락과 단락을 연결해주는 여백과 같은 것, 음악에서는 마디와 마디 사이의 쉼표와 같은, 즉 숨 고르기와 같은 것이다. 양지원이 이번 전시명을 ‘growing’ 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공간의 낯섦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잠시 머무는 자라난 문장들, 그리고 다시 그 문장을 지움으로써 원형의 상태로 다시 돌아오는 작가의 ‘그리기-쓰기’는 마치 싹을 틔워 열매를 맺고 다시 씨를 뿌리는 생명과 죽음의 순환과도 같다. 이것이 양지원이 가진 문장의 연속성이다.


그럼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양지원은 결국 물리적인 것들을 비워내고 정신적인 공(空)의 공간, 무(無)의 공간을 위해 벽을 빈 페이지로 선택한다. 그 문장들은 자라나다가 소멸하지만, 이는 다시 자라날 것이며, 우리는 다시 발아할 다음 단락을 기대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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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양지원의 텍스트 드로잉 <작업을 위한 행동>(2017)은 작가가 스스로 주어진 지시문과 같다.

2)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것은 집으로 비유하였다.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03

3)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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