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미필의 끝을 향해...

추연신 <미필적 흐름> (숲속갤러리, 2018)

by 연두
우리는 모두 바다를
떠다니듯,
유목을 닮아있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듯이
모질고 거친 삶에 놓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어느새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지.

추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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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다에 떠밀려 다니다가 갈고 닳았을까? 나뭇가지들은 떠다닌 시간만큼 단단하게 쌓였던 껍질은 벗겨지고, 진물이 빠진 이 삭디 삭은 나뭇가지를 마치 보물을 찾은 듯 고이 주워 담아가는 사내가 있다.
그의 산책길을 나의 눈도 함께 쫓아본다. 그는 도시에서 수목원으로, 그리고 수목원 나와 계곡과 보호수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옛 마을을 지난 다음, 그 여정의 끝으로 바다를 산책한다. 그가 걸었던 자리에 잠시 멈춰 생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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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단 : 소멸 수집 - 온실
추연신의 2018년 개인전 <미필적 흐름>은 이전 개인전에서 보여준 회화와 드로잉 이후의 작업이자 그가 습관처럼 해오던 <소멸수집> 시리즈부터 출발하여, 근래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유목> 작업으로 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전시이다.
이 전시의 발단이 되는 <소멸수집>은 앞서 그의 작업노트에서 밝혔듯이 장 클로드 무를르바의 소설 <거꾸로 흐르는 강>에 기인한다. 모든 것을 다 파는 만물상을 운영하는 소년 토멕이 소녀를 만나 거꾸로 흐르는 강을 찾아 신비로운 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도시를 떠나 유목과 소멸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작가의 작업과 닮아있다.
작가는 2년 동안 수목원에서 근무하면서 수많은 생명의 생과 사를 보고,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는데, 이 경험은 길 위에 죽어가는, 죽은 짐승 위에 온실 오브제를 가변적으로 설치하는 <온실> 시리즈의 계기가 된다. 이미 숨을 거둔 짐승 위에 덮은 온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왜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가 수목원에서 본 것은 단순한 자연의 섭리에 따른 생의 순환이 아니었다. 자연을 닮았다고 하나 결국 수목원 또한 온실과 같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시스템이었으며, 그 안의 생명들은 빠르게 소비, 훼손되고 있음을 지켜봤을 것이다. 그의 살아있는 것을 가두는 것이 아닌 이미 죽은 생명에게 무덤을 만들어주듯 잠시 씌워주는 이 온실 작업은 혐오와 연민의 감정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아마도 소년 토멕의 만물상은 작가에게 수목원이 될 수 있으며, 혹은 풍요로운 물질로 가득 찬 현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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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목, 관찰과 기록
이번 전시의 주 소재이자, 근래 추연신의 작업에서 가장 큰 변화한 지점이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유목> 시리즈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뭇가지로부터 시작한다. 이 나뭇가지들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후, 많은 시간을 강물이나 바닷물에 흘러 다니면서 썩지 않고 단단해진 상태로 해변가나 어딘가로부터 쓸려온 쓰레기 더미나 제방 사이에 주로 발견된다. 이 떠밀러 다니다 어딘가에 박힌 ‘유목’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업은 더욱 유목(遊牧)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는 유목을 채집하며 다닌 장소의 환경과 특성, 채집한 유목을 마치 생물학자가 된냥 진지한 태도로 분석하고, 자신이 고안한 ‘표준측정표’에 기록을 한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보고 ‘유목’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명쾌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현재 보고 있는 이 나무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 추연신의 유목적인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유목 줍기는 이제 수집의 행위에서 확장하여, 펜으로 만들어 타인과 공유하며 다시 쓰이게 한다. 그러나 그는 유목 줍기가 단순히 펜 제작이나 수집을 위한 줍기가 아닌 햇빛에 보기 좋게 말라 앙상하게 남은 뼈들을 줍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하찮다 여긴 죽은 사물을 뼈라고 비유하며 정성스럽게 갈고닦아 쓰이게 되는 물건(=펜)으로 가공하여 곱게 포장하는 과정은 추연신의 생과 사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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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강에서 수집하던 유목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옛 마을 어귀의 노거수를 찾아가 기록하고, 가지들을 줍는 것으로 확장한다. 그가 기록하고 있는 노거수들은 자기 생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경우도 있지만, 99년에 고사한 청주시 오창읍 구룡리의 느티나무처럼 마을이 사라지거나, 도시개발에 의해 베어지거나 죽은 것이 대상이 된다

추연신은 왜 이미 죽거나 혹은 죽음으로 향해가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건대, 첫 번째, 그가 언급한 미필적 고의와 같이 결국 모든 세상의 만물은 끝을 향해 흘러가는 것인데, 인간의 무분별 한 개발과 소비로 인해 죽거나 사라진 것에 대한 넋을 기리는 것이다. 모든 세상의 만물의 생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생에 집착하며 업보를 쌓는 미필적 고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로 모든 것은 자기 생이 있으며, 상황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미필적인 흐름 속 작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는 평면작업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애벌레나, 점묘기법으로 그린 하나의 점들을 통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3. 버드나무와 관세음보살

전시장 한구석에 놓인 작은 병에는 푸릇하게 잎이 자란 버드나무 가지에 관세음보살이 얹힌 <양류관음>이 있다. 이 버드나무는 추연신작가가 유목펜 제작과 더불어 커뮤니티 프로젝트인 버드나무펜 체험을 진행하다 나온 가지를 병에 넣어 작업실에 키우던 것이다. 불교에서 버드나뭇가지는 관세음보살이 정병과 함께 손에 쥐는 있는 것으로 중생을 치유해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버드나뭇가지로 펜을 만들고 쓰는 것이 치유의 행위가 되었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과 주문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이 <양류관음>은 전시 중에 우연히 마치 병 위에 살포시 앉은 것처럼 버드나무 잎사귀와 보살 이미지가 합쳐져 그림자가 나비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실 이것 또한 미필적 고의로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향후 그의 작업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우리의 끝은 미필(未必)적이기 때문에 추연신의 작업도 내가 쓴 이 글도 미필(未畢)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세상의 끝을 향해 흘러가고 있고, 그 언저리에 유목적 삶을 줍는 한 사내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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