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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Feb 09. 2021

매운 추위

민음사 '인생일력' 데일리 명언 에세이 11 : 2021년 1월 11일

파를 하얗게
씻어서 쌓아 놓은 
매운 추위여  

-바쇼의 하이쿠 




CCTV에 바퀴가 헛돌아 움직이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차량들이 보였다.



 

얼마 전 생각지도 못한 내린 중부권의 폭설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폭설 이후로 며칠 동안의 추위는 파의 아린 향보다 더 매서웠다. 베란다나 방의 창문, 세탁기, 자동차까지 꽁꽁 얼어붙어 녹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뼛속까지 어는듯한 추위가 이런 거구나 뼈저리게 느껴본다. 

민지 역시 그날 저녁 6시 언저리만 해도 눈이 올 것이라고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민지는 그날따라 오전, 오후 시간을 허송세월 보내면서 업무를 미루다가 잔업 초과를 신청하였다. 저녁을 좀 일찍 먹고 그날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나 보니 8시 반쯤 퇴근을 하려던 계획이 어긋나고 저녁 9시쯤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재앙은 달콤하고 자극적인 정크푸드처럼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결국 끌러가게 된다. 민지는 사무실을 나와 예정된 재앙을 향해 운전을 시작했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니 낮과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겨울만 되면 떠오르는 유명한 애니메이션과 유명한 ost가 생각이 난다. 정말 엘사가 이 곳을 찾아왔나?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눈을 본 것은 15년 전 신입생 시절에 본 이후로 처음이다. 세상은 하얗게 변했고 도로 위에는 하얀 길에 미끄러져서 4개의 바퀴가 달린 이 금속 덩어리 몸체 자체가 통제가 안돼 미끌리거나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는 오지 않은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얀 빙판길 위해서 춤을 추는 차들을 얼이 빠진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신 못 차리는 차들 사이로 27km 정도의 퇴근길을 오른다는 것은 아마도 민지의 인생에 손을 뽑을 수 있는 목숨을 건 위험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도로에 멈춰있는 차들과 숨이 막힐 정도의 눈발을 보면서 민지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절실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같은 도로 위에서 30분이 지난 민지는 절망스러웠다. 사무실을 떠난 지 1km 채 되지 않아서 다시 사무실로 차를 돌릴까, 주변 호텔이라도 방을 급하게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 뒤로 막힌 차 사이에서 유턴을 하거나 경로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민지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그대로 고속도로를 운 좋게 타고 거북이 걸음마처럼 평소보다 2배는 걸리는 시간을 걸려 집으로 도착하였다.


 가끔 고집 부림이 먹힐 때가 있다.


민지는 집에 도착하고 나니 의외로 항상 가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상황이 되었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를 돌렸다면, 비교적 많은 차량의 유입이 되는 고속도로보다 도로 상태가 달라 여러 변수가 있는 시내 도로주행이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곳을 신중하게 가는 게 가장 안전하기도 하나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는 현명한 판단과 추진력이겠지만, 아직 삶의 역량이 부족한 민지가 취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정석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반대로 고민 없는 습관은 자신을 정체하고 발전하지 못하게 한다. 민지는 당시 사무실에서 집으로 출발하기 전 지인들에게 오는 연락의 내용을 대충 읽고 퇴근길을 급하게 나섰다. 출발하기 전에 날씨와 도로 상황을 한번 더 체크한 뒤에 움직였더라면, 긴 시간을 도로 위에 서있지 않았어도, 다음날 다시 새벽 일찍 출발하지 않고 내 에너지와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실패와 후회의 경험은 겨울 서리를 맞은 차디찬 매운 파맛


 뭐 그런데 이런 급작스러운 상황까지 매번 무릎을 탁 치는 판단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매운 것을 먹으면 가끔 머리가 핑 돌고 그 아린 것에만 신경이 집중되어 뇌가 마비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파에 수도가 얼고 차 배터리가 방전되는 것처럼 추위는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매서움이 있을 수도 있다. 민지는 빙판 위를 달리면서 너무 무서운 마음에 운전을 잘하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것도 경험이야. 운전하면서 한 번 겪어봐야 해.' 그래, 이런 매운맛은 너무 얼어있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면서 단련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민지의 하루였다.



연결해서 읽을거리 

-하이쿠와 겨울 이야기를 담은 2021년 1월 5일 에세이 

  https://brunch.co.kr/@yeonjul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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