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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May 19. 2021

달밤의 기억

민음사'인생일력'과데일리 명언 에세이 - 2021년 1월 18일

달 밝은 밤 조용히 앉아 
홀로 읊조리는 소리에 서늘함이 출렁이네
개울 건너 늙은 학이 찾아와
매화꽃 그늘을 밟아 부수네 

-옹조 <달밤>



매화오좌월(梅花烏坐月)
-옹조{翁照)

靜坐月明中(정좌월명중)
孤吟破淸冷(고음파청랭)
隔溪老鶴來(격계노학내) 
踏碎梅花影(답쇄매화영)


 오늘의 문장은 청나라 시인 옹조의 달밤(梅花烏坐月)이다. 


 달밤의 빛은 수많은 세월 동안 글을 짓는 이들에게 많은 영감과 감성을 유발했나 보다. 

 아직은 여물지 않은 예민하고 바스르한 감성을 가슴 폭에 안고 혹독한 입시의 열병을 치렀던 10대의 소연이 바라보았던 그 오래된 달밤이, 20년이 지나 30대 후반이 된 소연에게 다시 찾아온다. 


 2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온 소연은 소녀 시절 품에 안고 있던 하나의 글을 다시 꺼내어본다. 

 '글을 쓴다는 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노동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는 소연에게 이따금씩 마주하는 달밤의 영롱함은 마치 거의(?) 망해버린 미니홈피에 비공개로 적어놓은 일기장을 열어보듯 가녀리지만 과잉된 감정들을 쏟아부었던 '글'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달'은 우리에게 은밀하게 영감을 준다.

달빛이 호수의 물결을 타고 나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달밤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곧 불혹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있는 소연은 최근에 몇 년을 뼈를 갈아 바친 직장에서 나오게 된다. 

직장인 소연은 직생(직장생활의 생명)은 시한부였다. 

직생의 생명연장을 실패한 그녀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업무능력과 시간의 값을 제대로 쳐줄 너그러운 회사가 있을까? 


소연에게 두 번을 기회를 주지 않은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잃을 만큼 함몰되어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그녀의 시한부 직생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자그마한 기대를 품고 수많은 밤을 집이 아닌 사무실에서 자신의 인생을 직생에 갈아 넣었다.


-

소연은 밤의 시간이 좋았다. 

이 직장에서 보냈던 수많은 밤은 그녀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고, 그 영감은 다시 새로운 기획을 만들어내고 온전히 일에  자신을 갈아 넣는 실수를 하게된다. 이렇게 미련하게 소연이 일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불행하게도(?) 회사의 환경이 도심 한복판이 아닌,  거대한 호수를 큰 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근무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기척도 불빛도 없고, 정적만이 존재하는 칠흑같이 어두운 호수의 밤 날들은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시간이다.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해야만 활자를 적어 내려 갈 수 있는 환경은 시각도, 촉각도, 청각도 각자의 일을 잠시 미룰 수 있는 찰흙 같은 어둠이 주변을 감싸고 있을 때이다.


최적의 환경에 최고의 집중을 하는 소연이 잠시 치기 어린 감성에 빠지는 유일한 시간은, 달빛이 어둠에서 존재를 크게 드러낼 때이다. 크고 둥근달이 뜨는 날은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호수의 밤에도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어느 날 등장하는 하얀 달빛을 마주하는 날, 소연은 잠시 일을 멈추고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달빛을 쬔다. 온 감각을 고이 접어두고 메마른 업무의 시간을 보내던 소연은 하얀 달이 호수의 지평선에 드리울 때, 마치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감각을 전환시킨다.

 

어둠 속 하얀 달빛은 매일 보았던 일상의 풍경이 새로운 감각으로 자극하여, 온몸을 타고 흘러내리고 순간 숨을 멈추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나 보다. 그러나 이는 저주와 같았다. 달의 저주. 그저 소연이 밤마다 마주하는 하얀 달에 홀린 것인지, 노동자의 실낱같은 희망으로 착취를 일삼는 회사의 어두운 큰 그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가 그 달밤에 홀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소녀시절 달을 보며 적어 내려 갔던 소연이 쓴 그 '글'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글'들은 어설픈 감성들의 편린들이었지라도, 그녀가 상상해왔던, 그리고 꿈꿨던 꿈들이 있었다. 


달은 그녀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이따금씩 상기시켜주는 서랍과도 같다. 


이제 소연은 오롯이 '글'의 노동으로 자신을 먹여 살려야 한다. 수많은 시간 직생을 위해 뛰어왔던 그녀의 글들은 갈길을 잃은 것이다. 한편으로 그녀의 '글'들은 이제 직생을 위해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소연 자신에게 있다. '글'은 자유를 찾음과 동시에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이 밤의 여왕은 해와 같이 화려하게 존재를 드러내거나 강한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더라도, 어둡고 막막한 길 위에 서있어도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소연의 머리 위에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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