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우리들의 슬픔

괴테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by 사색가 연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책을 읽다가 좋아하게 되거나 더 알고 싶어 지게 되는 작가들이 생기면, 그들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어떤 생각을 갖고서 삶을 바라보았는지 궁금해진다. 그럴 땐 그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청년 시절 때 썼던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1774년이 되던 해, 만 24세의 나이에 쓴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곧 만 24세를 앞둔 나에게 있어 이 작품은 가치가 크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기점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영향력을 주어 베스트 셀러로 등극하기도 했다. 심지어 젊은 층의 독자들은 그의 소설을 읽고서 베르테르와 똑같은 복장(푸른 연미복에 노란 넥타이)을 입고, 똑같이 자살을 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른다. 그만큼 한 시대에 큰 파장을 일으킨 그는, 현대에 들어선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중 하나로 꼽힌다. 또 독일어 자격증 시험의 이름도 괴테라고 지을 만큼, 독일에선 그의 위상을 굉장히 높게 쳐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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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다 보면, 300년 전, 그것도 아시아가 아닌 세상 먼 유럽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곳이 어디든,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진 않구나.'라는 걸 느낀다. 300년 전 유럽의 청년들도 나름의 세상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사랑받길 원했으며 또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테도 그랬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경위는 이렇다. 그는 1772년, 법률 실습을 위해 떠난 ‘베츨라르(Wetzlar)’라는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샤를로테 부프’라는 아리따운 여인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요한 크리스티안 케스트너’라는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다. 그렇게 괴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고 만다. 그런데 곧이어 비극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가 베츨라르에서 만난 '카를 빌헬름 예루살렘'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도 결혼한 여성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게 되었으며, 끝내 손에 권총을 쥐고서 자살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괴테는 자신의 이야기와 친구의 비극을 이야기로 담아내었고, 그가 24살의 나이에 2주 만에 집필하며 탄생한 소설이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작품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일단 소설 속 전개되는 내용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간단하게 간추려보자면, 베르테르는 '로테'라는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이미 있었다. 그럼에도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이미 있던 로테를 포기하지 못한 채, 계속 그녀를 짝사랑하며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그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고뇌와 감정을 편지에 담아내 친구인 빌헬름에게 보낸다. 이 소설은 이렇게 베르테르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서간체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베르테르가 죽고 난 뒤, 서간체 형식이 끝나고 서술자를 3인칭 형식으로 바꾼다. 독자들은 이때 마치 거세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가 소멸한 뒤, 고요한 적막 속에 놓인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작품 후반 부로 갈수록 펀지에 담긴 베르테르의 감정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그게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만의 독특한 문학 사조인 ‘질풍노도의 시기(Strum und Drang)’때에 쓰인 작품이다. 질풍노도 시기 문학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반항적이고 감정적이며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을 과감하게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크게 4가지 테마로 구분지었다. 청년 괴테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감정''행복과 불행', '우울과 자살' 그리고 '당시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선'. 이 책을 읽다보면 그가 느꼈던 감정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과감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정말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들이 막 쏟아지는 걸작이다. 사람들은 흔히 괴테라고 하면 대표작으로 <파우스트>를 꼽지만, 막상 괴테 본인은 평소 아끼는 자신의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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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우리들의 슬픔


어릴 적 선생님이 우리에게 물으셨다. ‘여기서 한 번이라도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한 적이 있는 사람은 손!’ 나는 곧 충격을 받았다. 반에서 나 포함 2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손을 든 것이다. 이 일은 고작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만 11세~12세에 불과한 아이들이 자살 시도를 해 봤거나 자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는 거다. 그 일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니,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자살을 왜 하려 하지?’라고 생각했던 난데, 그런 내가 어느 새부턴가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젠 ‘살면서 자살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고등학교에 들어서 나는 본질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왜 가야 하는 거지? 나는 왜 공부를 하는 거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거지?’ 우리는 평생 어항 속에 갇혀 주는 대로 먹이만 받아먹다가, 이제 다 컸으니 냅다 어항 채로 바다에 던져진 금붕어들과도 같다. 그러니 대부분 성인이 되어서도 마치 무슨 계약이라도 맺은 듯,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인 공부를 하고 있고 취업을 목표로 한다. 그것을 심지어 ‘능력’이라고 부른다. 사실 그런 점에서 ‘현대’라는 의미에서의 ‘모던’은 근대라는 의미의 ‘모던’에 모든 문제를 박제해버리고 그럴싸하게 포장되어있는 껍데기와 같다. 실상은 과거와 비교해 인간 사회의 내면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같은 세대의 모든 이들 또한 저마다의 비슷한 고뇌를 들고 있을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굳이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정보들까지 접하게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평생 모른 채로, 나를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고 무언가에 쫓기듯 유령처럼 관습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리어 ‘도태’‘실패’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누군가는 ‘그래도 이 정도면 살만한 사회지….’라고 생각이 들진 모르겠지만, 사실은 머리만 살아있고 몸은 죽은 사회다. 이성이 자전거의 몸체라면 감정은 그것을 움직이도록 하는 페달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성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혹은 도착할 것이라 믿지만, 사실 우리는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은 채 허공에다 발길질하며 몸체는 부식되도록 가만히 놔두고 있다. 그것이 몸도 머리도 썩게 만드는 최악의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맞닥뜨리게 된다. ‘나는 뭘 위해서 살아온 걸까?’ 자신의 얄팍한 믿음이 깨지고서 안정이 무너지게 되면 공허한 삶이 다가온다.


베르테르에게 필요했던 건 ‘사랑’ ‘안정’이었듯이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지하고 따분하게만 느끼지 않았으면 좋을 것들을 버리고, 반항과 창조의 정신을 잃고, 그렇게 뇌만 멀쩡하고 몸은 죽어버린 정신으로 사랑과 안정조차 돈으로 사들인다는 말까지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성객관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어쨌거나 현대인들은 그것들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희생으로 이룬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다. 고로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이 있듯이 이성과 감정을 적절하게 표출할 줄 알아야 한다.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에만 몰두하여 모든 문제를 이해타산적으로만 바라보는 냉소적인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하며, 반대로 감정에만 몰두하여 현실을 부정한 채 있지도 않은 길을 고집하며 괴물에 잡아먹히게 되는 무모한 인간도 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라면 마음속 한구석에선 이성에 반항하는 정답을 찾으려 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엔 삶과 희망을 추구하는 강력한 감정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자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는 것에 손을 들었던 것은 아마도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라는 의미보다는, ‘나는 지금 반항하고 싶다.’라는 욕구의 표출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또한 ‘나는 잘살고 싶다.’라는 놓치고 싶지 않은 의지였을 것이다. 희망에 도전하다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삶의 목적과 희망을 찾으려 애를 쓰는 것 또한 인간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지금 젊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이다. 내가 보았을 땐 그냥 인간 자체가 아이러니한 생물이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상처를 받아도, 아픈 기억이 있어도, 그럼에도 타인의 애정을 갈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은 진리에 가깝다. 그리고 이 진리는 ‘우리는 진실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내가 베르테르를 읽고서 생각한,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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