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공기를 바꿀 아우라, 나만의 캐릭터성
부모님 집 거실엔 벽화가 하나 놓여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그림이고, 누가 그렸는지는 모른다. 옛날에 부모님이 그냥 밖에서 싸게 팔던 그림이라 사 오셨다고만 들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는 이와 같은 그림을 우리 집에서 밖에 본 적이 없다.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이 그림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와 느낌으로 거실이란 한 공간을 매우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곤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들은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말이 많지도 않다.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혼자서 무대를 꽉 채우는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이 주위에 나타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게 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물론 아우라라는 것이, 말이 별로 없는 내향적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말없이 조용히 자신만의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타인들과 잘 어울리며 외향적으로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분위기를 주위에 내뿜는 사람이 있다. 결론적으로 '아우라 있는 사람'이란, 단순한 외적인 스타일을 넘어 '그 사람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와 존재감'을 의미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MBTI에 열광할까? 그것은 하나의 캐릭터로써 나와 타인을 쉽게 특정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 MBTI가 INTJ라면, INTJ에 관한 영상들을 찾아보곤 '아... 나는 이런 캐릭터구나!'라고 자신을 쉽게 정의할 수 있다. 다만, MBTI는 사람을 100% 설명하기엔 당연히 무리가 있다. 우리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같은 MBTI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결국 사람은 제각각 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실제론 나 자신을 정의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며, 이로 인해 남과 비교당하면서 자기 자신 자체를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우울증이란 대게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게 되면, 본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MBTI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16가지 유형에 의해 쉽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캐릭터를 가질 수 있다. 단지 이것이 재밌는 거다.
그래서 캐릭터성이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 '개성'과 '특징'을 의미한다.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규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은 삶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 큰 긍정적인 힘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것이 무르익어갈 때쯤엔, 비로소 독보적인 하나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 남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 말이다. 이건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결국 다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어디엔가 존재할 순 있지만, 나와 완전히 일치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환경은 이를 존중해주지 않았다. 나 포함 대부분 학생들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얼마나 더 정확하고 빠르게 문제를 풀어가는가.’에 대한 경쟁식 훈련만 받아왔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일종의 ‘기능 시험’이다. 그런데 이 기능이 과연 미래시에 지속 가능한 가치가 있는 기능일까? 대게는 어려서부터 동일한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왔고, 이에 지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방황한다. 이건 사회 시스템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나와 다른 이들을 존중해 주기보다도 오히려 그들을 향해 비아냥거리고, 조금 다르다 싶으면 배척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뱉는 행위 자체에 겁을 먹고서 유령처럼 관습을 따라간다.
'아우라'라는 개념은 발터 벤야민의 철학에서 '고유성과 독특함, 경험에서 나오는 특별한 분위기나 에너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은 '기술복제'에 있어 아우라가 상실된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저서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제기한 개념으로, 예술의 고유성과 독창성, 그리고 그것이 지닌 '전통적 가치와 분위기(아우라)'가 기술 복제를 통해 손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가치를 이해할 때, 희소성을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한 예술작품이 기술복제로 인해 양이 늘어나게 되면,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아우라가 상실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림의 가격은 그것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제시하기 나름이다. 터무니없는 가격이어도, 타인은 그 가격을 조정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원본은 하나뿐인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제를 통해 예술은 일상적인 소비재로 전락하고, 감동과 경외감이 감소하게 된다. 모나리자의 원본과 복제품은 실상 눈에 보기엔 다른 것이 없지만, 복제품은 원본이 가져다주는 분위기를 따라갈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복제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 작품의 기술복제는 대중화에 있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창출했다. 다만 인간은 그림과 다르다. 인간은 '욕구'가 있다. 자신의 독창성과 정체성이 희석되었을 때, 나를 드러내고 보여주고 싶은 자아의 욕구는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게 된다. 물론 인간사회에 있어 대중화는 필요했고, 중요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고유성을 잃고, 정체성이 희석되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들 각자만의 아우라의 상실을 불러왔다.
하지만 우린 충분히 긍정적인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도 내가 브런치라는 공간을 빌려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과거에 비해 우리는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도구와 기회가 확실히 많아졌다. 과거에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서만 공유되었던 경험이, 기술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브런치가 '나만의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처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누가 보면 별 것도 아닌 경험도 나만의 고유한 생각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연습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중에 떠도는 흔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떠올려 보자. 내가 어떤 캐릭터인지, 어떤 캐릭터가 되고 싶은지. 그것이 무르익는다면, 본인의 아우라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동료들 또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내가 떠오르지 못한 사색의 영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린 모두 다르기에,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단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