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잘 알고 있을까?
혹시 남이 찍어준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혹시 그 사진을 보았을 때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남이 찍어준 사진 속 내 모습을 보자면 대체로 그래왔다. 사진 속 내 얼굴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오른쪽은 선명하나, 왼쪽은 살짝 아래로 처져 있는 얼굴. 마치 남들 몰래 숨겨놓은 나의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보고 있자면 웬지모를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올라오곤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평소에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자주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자주 보고 살아왔다. 이는 어떻게 보면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내가 보는 내 모습만을 자주 보고 살아왔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놓고 괜히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은 익숙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이면을 잘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싶다면, 그이의 배경을 잘 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작가가 어떻게 이러한 작품을 꺼내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을 때, 그 작가의 삶을 탐구해 보는 것과 같다. 그럼 더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나의 삶과도 통하는 공감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매력을 느낄 시, 어느 한 작가의 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의 배경을 제대로 탐구해 본 적이 있었을까? 거울 속 배경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지금 당신의 방에 놓인 거울을 한 번 보라.
그러고는 "너 자신을 알라"며 오른손을 들고 삿대질해 보라.
그러면 그놈은 왼손을 들고서 당신에게 똑같이 외쳐댈 것이다.
좌우 반전이 된 거울 속 배경을 보면 그렇다. 얼굴은 익숙할지 몰라도 오른쪽에 있던 책장은 왼쪽에 가 있다.
언제 한 번은 사진을 찍어준 친구에게 물어봤다.
“야, 이게 니네가 보는 내 모습이야?”
“어.”
“믿을 수가 없네.”
“근데 그거 너 맞아,”
괜히 서운했다. 마치 내가 숨기고자 했던 치부를 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실이란 것이 때로는 불편한 사실일 때가 있다. 어쨌거나 그 친구는 나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익숙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구린 모습을 남들보다도 더 잘 살펴보려 하지 않으려 하는 면이 있다.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는 일은 괴롭고도 두려운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솔직함이란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선 쉽게 납득을 하기 어려워한다. 지금까지 바라봤던 시각이 이미 뇌에 고정이 되어 버렸는데, 그것을 어떻게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자신이 생각했던 가치에 대한 기대심리가 무너졌을 때, 대개는 그것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마치 사진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부정라는 것처럼.
거울 속 내 모습은 애초에 거의 나밖에 보질 않는다. 그런데 어떤 날엔 유난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아름답다거나 멋있어 보일 때가 있다.(물론 이건 심리학적으론 지금 자신의 심리적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외부의 시선은 보기보다 냉정하다. 타인은 살짝 아래로 쳐진 내 왼쪽 안면을 항상 보고 있다. 이처럼, 때로는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이 더욱 객관적일 수가 있다.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모습을 남들은 계속해서 보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불편하더라도 수용해야 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은 대개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생각보다도 인간은 꽤 복잡하며 언제나 양면성을 띠는 존재이기에.
물론 자아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이는 '자기 탐구'의 개념이다. 나만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남들의 시선을 받아내기란 중용의 자세가 필요한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아 인식은 대개 타인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내 본명이 '연두'라고 치자. 그럼 내가 '연두'일 수 있는 이유는, 남들이 '연두'라는 이름을 불러줄 때에야 비로소 '연두'라는 이름이 나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벽화>에서 제시한 아우라와 아이콘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 스스로 아이콘이라 치부하고 아우라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아이콘이 되거나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 될 순 없는 것이다. 그런 착각과 망상 속에 빠져 살면 정말 곤란해진다. 결국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남들의 시선 속에서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정의하게 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너무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지 말 돼, 그렇다고 해서 아예 벗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란 참으로 모호하고 어려운 것이다.
사실 자기 탐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할 숙제와 같다. 거울과 사진에 비친 내 모습은 그 사람들이 보는 '나의 외면'이다. 내가 사진 속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던 것은, 나는 '나의 내면'을 무시한 채 외면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기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을 '고독'이라 부른다. 고독의 시간은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나 자신의 구린 면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완벽한 사람이 될 순 없다. 또한 누구든지 저마다의 결핍은 다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자신의 결핍과 진실로 마주해 보라.
그래야 비로소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나를 더 인정하게 되고,
나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