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옷걸이

나의 하루를 걸었다

by 사색가 연두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아니면 좀 엉망진창이셨나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도 나는 나의 하루를 꺼내었으며, 일정을 다 마치고 난 뒤에는 다시 하루를 걸어 놓았다. 내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편안한 것, 아니면 멋있는 것? 요즘엔 날씨가 추우니 일단 두꺼운 것을 골라야겠지 하며.


우리는 밖을 나서기에 앞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고른 그 옷이 오늘 내 하루의 무게를 같이 버텨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반듯했던 내 옷의 얼굴은 점점 구겨진다. 주름이 생기고, 먹다가 흘린 음식의 흔적이 묻기도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날에 내가 느꼈던 '감정'까지도 함께 묻어난다. 기쁨과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면 그 옷엔 행복한 기억이 담기게 될 테고, 반면 슬픔과 후회스러운 하루를 보냈다면 불행한 기억이 담길 것이다. 꼭 하루 단위가 아니어도 된다. 한 시절에 대한 여러 기억과 복합적인 감정도 떠올릴 수 있다. 교복을 보고 있자면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르고, 군복을 보고 있자면 군대 시절이 떠오르듯, '아 맞아. 그땐 이런 옷을 입고 있었었지.'라며. 이처럼 옷은 우리의 세월을 담아낸 사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나서 옷을 벗게 될 때, 우리의 몸은 한결 홀가분해진다. 오늘의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 하지만 함께 내려놓지 못한 마음의 무게 또한 있다. 그런 채로 우리는 옷을 옷걸이에게 건네준다. 가만 보면 옷걸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언제나 나의 하루를 맡겨도 꿋꿋이 옷을 들고 버틴다. 투정도 부리지 않는다. 옷들의 형태를 단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버팀목이 되어주어 구겨지거나 흩트림 없이 지탱해 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옷을 고르고 다시 그 옷걸이에 거는, 이 일련의 단순한 반복적인 행위에 사실은 하루의 시작과 끝이 담겨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내 하루의 흔적을 옷걸이에서 꺼내오고 다시 걸어놓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서랍> 속 옷걸이에 걸어놓은 옷들과 같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으면 그것을 걸어놓고서 나중에 또 꺼내어 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걸어놓고서, 또 자신도 모르게 꺼내어 보게 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잠들기 전 괜히 부끄러운 일들이 생각이 난다거나, 차를 타는 도중 뜬금없이 후회되는 일이 생각난다거나, 공부를 하는 도중 갑자기 괴로웠던 일이 떠오르거나 하는 식으로. 원래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 땐 우리는 시간의 약을 빌리곤 한다. 아무리 지금 괴로워도 대개는 지나고 보면 다 별 것 아닌 기억들인 게 대다수였다.


그러니, 굳이 좋은 기억만을 담아둬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좋든 싫든, 그것이 어떠한 순간이든 간에 모든 기억들은 우리의 경험과 감정의 역사가 되어준다. 역사가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려 싸우는 나만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정말 특별하다. 자세히 말하자면, 옷들이 아니라 그 옷들을 걸도록 가능하게 해주는 옷걸이가 특별하다. 우린 옷걸이가 없으면 아무런 기억도 저장해 둘 수 없다. 저장해 두더라도 뒤죽박죽 엉켜진 경험과 감정의 역사는 온갖 구김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나만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길을 헤맬 것이고, 서사는 점점 산으로 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성장에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긴 하다. 다만 경험이란 것도 단순히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런히 기억하고 필요할 때 꺼내어 쓰는 것이다.



단정하게 걸어 놓기.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막상 걸어 놓은 기억들의 무게를 보면 두려워지기도, 막막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때론 설렘과 기대나 희망 같은 시작을 위한 긍정적인 힘도 얻을 수도 있다. 걸려있는 옷들을 보며 똑같이 느낀다. 기대로 가득 찬 채, '오늘은 이 옷을 입고 나가야지!' 하며 나의 하루를 같이 버텨줄 것들을 몸에 걸쳐 보자. 그런 시작이 하루의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바꿔줄 것이라 장담한다. 다만, 그 옷장에 걸려있는 옷걸이들도 한 번 보라. 나의 역사를 단정하게 지켜주는 그들의 존재를. 우리가 단정한 하루를 살아가도록 돕는 고마운 녀석들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옷걸이에 옷을 걸며


나의 기억을 걸었다.




오늘 하루 당신은 무엇을 걸어 놓으셨습니까?







keyword
이전 10화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