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어느 여름, 살면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장소는 전라북도 군산 어딘가였다. 날씨가 엄청나게 더웠다. 피부가 타 들어갈 만큼의 햇볕 아래에서, 정확히 어딘지 모를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거의 1시간 가까이 그곳 벤치에 앉아 가만히 버스를 기다렸었다.
평소 같은 날과 평소 같은 장소였으면 기다리다 지쳤을 텐데, 이상하게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시간은 평온했다. 마치 그 공간이 언제든지 쉬어가라며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괜히 옛날 생각이 묻어 나오기도 하고, 벌레들의 백색소음과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잘 어우러진 오케스트라와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쉴 줄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기다림을 단순히 '시간 아까운 행위'로만 받아들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은 멈춰있어도 시간은 계속 흐르기에 거기서 오는 불안감은 무지하게 자기 자신을 괴롭게 만든다. 하지만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에 깊은 이해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정말 중요한 일이다. 우린 정신없이 나아가다 보면 되려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을 맞닥트리곤 한다. 그러고 나면, 나라는 존재 자체의 의미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 지 20분 정도가 지날 때쯤에 나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이렇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다림이란, 어디론가 도착하기 전 혹은 누군가를 만나기 전,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존재함을 느끼는 행위'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거지?'부터 시작해서 '내가 가려는 곳은 어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스스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준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느꼈다. 이곳 사람들은 그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반면, 도시 속 사람들은 정신없이 달려가는 하루에 익숙하다. 서로 먼저 타려고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끼워 넣는 일에 익숙하다. 우린 기다림을 잊었다. 뭐든지 '빨리! 빨리!' 그러다가 주변 것들을 많이 놓치게 된다. 나는 특히나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어서 더욱 그랬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이 언제인지, 가장 특별했던 날은 또 언제인지,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니 뚜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그렇게 어디론가에 도착했을 때, 남는 건 공허함 뿐이었다. 이 길은 또 어디이며,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누구였는가? 이러한 막연한 고민까지 하나 더 챙기게 되면서.
나는 곧 정류장 주변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들을 보기도 하며, 작게 피어난 꽃의 흔들거림을 마주하기도 했다. 화려하진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 뿐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나 여유로운 시간을 재구성해 본 적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어지럽혀 있던 생각을 가꿨다. 그리고 주변의 작은 것들을 보며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어느새 도착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은 끝을 맺었다.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버스 안 창가를 내다보며 생각했다. '다시 나아가기 위한 기다림이었다고.'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해진 채로 눈을 감는다.
그러자,
멀어진 정류장이 속삭인다.
네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때면
여기 잠시 앉아 기다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