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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바라보는 시선

by 사색가 연두

나와 당신이 같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맞다면, 지구라는 공간 아래서 바라보는 하늘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각각 서로 다르게 세상을 인식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 자신은 세상 그 자체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저 자기 내면의 시선을 끌어내어 바깥에 투영하는 것뿐이 아닐까?


계절이 바뀐다. 창문에 비친 나무의 색깔이 바뀐다. 공기도 다르고, 온도도 달라진다. 주변 풍경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샌가 조금씩 바뀌어 있다. 그렇게 창문 하나를 두고 있자면, 세계는 둘로 나뉜다. 내 안의 공간바깥의 공간으로. 예를 들면, 내가 안에서 바라보는 창문 밖의 풍경은 고요하다. 하지만 실제론 자동차 배기음, 공사 소음, 개가 짖는 소리,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등 다양한 소란스러움이 담겨있는 곳이 바깥세상이다. 닫혀있던 창문을 열어젖히면 안쪽 세계의 안정감과 고립감은 바깥 세계의 자유로움과 혼란스러움에 섞여 혼합된다.


창문은 투명하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은 벽을 두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거기다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투영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혹시 창문을 통해서 야경을 볼 수 있는가? 그럼 언제 한 번쯤은 저 멀리서 보이는 불빛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다만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현실은 피곤에 찌든 채 야근을 하는 사람들 혹은 밤늦게까지 시험이나 취업을 위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투쟁의 불빛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린 멀리서 그들이 만들어낸 야경을 보며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런 다소 기이한 연출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기대와 현실은 항상 이렇게 삐끗거린다. 투명하다고 믿으며 바라본 현실이 자세히 보니 왜곡되어 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던 것일까.


창문은 안과 밖의 경계를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는 사물이다. 바깥세상은 넓지만, 내가 놓인 방의 내부는 제한적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제한적인 공간에선 세상을 왜곡된 채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평생에 많은 시간을 어느 제한된 공간 내부에서 보내게 된다. 우린 결국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제대로 볼 수 없다. 모든 걸 체험할 수도,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창문을 한 번 바라보라. 바깥 풍경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반사된 내 모습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바깥세상과 동시에 나 자신의 모습까지도 마주하게 된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세상을 바라볼 때, 본인의 자아를 제외하고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뇌엔 보정을 하는 기능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생각보다 어떠한 문제를 판단하는 그 '기준'이 굉장히 편협하다.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외적인 것을 자연스레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다른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린 충분히 이 까다로운 과정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이해는 대게 '인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서로가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들이 살아온 내부의 환경이 다 다르기에, 그 주위 모든 것들이 다 다르기에, 당연히 나와 생각이 100% 똑같이 일치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거의 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쌍둥이들 마저도 개인의 가치관은 서로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우리는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쥐고 살아가는 생물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선, 현대 사회를 흔히 혐오와 갈등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혐오와 갈등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애초에 그게 과연 실제로 '존재했던' 현상이었을까?


실제로 존재하던 현상이 아니었다면,


그런 혐오와 갈등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두고 왜 서로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본인에게 있지도 않았던 일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며,


본인이 보지도 않았던 일을 마치 보았던 것처럼 착각하며.



나 또한 마찬가지로 세상을 100% 이성적으로 이해하며 바라볼 순 없다. 그렇기에 만약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사색하는 동료로서 과감하게 당신의 사색의 결과를 알려주길 바란다. 본인은 정말 감사하게 그 결과를 들어주고 같이 생각해 볼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스스로 자정기능을 갖춘 지혜를 지닌 생물임을 잊지 말자. 물론 어느 정도의 고집은 필요하겠지만, 가능성은 언제나 열어두는 것이 이롭다. 마치 내 방 속 공기가 탁해졌다면 한 번씩 창문을 열어두는 것과 같이,




자신의 내면세계도 활짝 열어 환기시켜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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