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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ee Oct 20. 2021

선택적 건망증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특히 나 자신에 관해서는 지독한 선택적 건망증인 건지 나의 손을 탄 건 죄다 하자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공개적으로 쓴 글이나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다시 들여다보는 건 되도록 피하려는 습관이 있는 이유다. 괜히 펼쳐 봤다간 분명 뒤늦게 보이는 구멍들을 발견할 테고, 스스로 빚어낸 하자를 마주하는 것만큼 자괴감 드는 일도 없다.


나의 어설픈 결과물을 돌아보지 않은 채 더 잘할 순 없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그건 요행을 바라는 일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없다면 결국 나는 실체 없는 부족함에 끊임없이 쫓기고 말겠지. 정확히 어떤 점이 부족한지 모른다면 뭐가 나아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론 더 나아갔을지 몰라도 그조차도 나에겐 결국 부족함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내가 해온 것들을 막상 다시 들여다보면 진짜 생각만큼 구리냐, 물론 진짜 말도 안 되게 구릴 때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내 선택적 건망증의 피해물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별로도 아닐 뿐더러 아주 드물게는 내가 한 게, 또는 내가 쓴 게 맞나 싶은 뜻밖의 선물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다. 모난 뗀 석기 같은 돌들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쁜 조약돌을 군데군데서 발견하는 경험.


그렇게 직접 마주함으로써 알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실은 꽤 괜찮을 때도 많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 내가 나를 긍정하는 일은 거창하게 단점을 장점으로 생각해본다든지 내가 가진 반짝반짝함을 스스로 상기시키는 일이 아니었다. 시작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눈 크게 뜨고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룬 건 아무것도 아니고 나의 지난 과정 또한 별 게 아닌 것 같아 작아지는 순간이 오면 가장 먼저 나는 지독한 선택적 건망증이 있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그리곤 기억 속 나의 돌멩이가 진짜 그렇게 흙이 묻어 있고 투박한 모양새를 띠고 있는지 만져봐야 한다. 어떤 모양을 하고 어떤 촉감을 가졌는지 진짜 그런지 자꾸 만져보고 알아야 한다.


막상 만지기 전엔 두렵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멩이의 모난 부분에 바보같이 마음을 베일까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어 직접 만져봐야 한다. 생각했던 것만큼 뾰족하지 않아 위험하지 않고, 제 모양도 그리 나쁘지도 않다는 걸 자꾸자꾸 만져보며 스스로 정말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선택적 건망증에 맞서 실체 없는 불완전함에 지지 않을 수 있다. 부족하다는 생각과 감정에 지레 겁먹고 있는 거라며 스스로 다독이고,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경험을 기꺼이 열어볼 수 있다.


뭐든 느린 나는 이조차도 한 번에 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처음 들춰 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거고, 들여다보자마자 으악! 하고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 더 집는 것. 한 군데 더 만져보는 것. 끝까지 보지 못하고 덮더라도 다음에 열어볼 땐 조금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것. 천천히 나의 불완전함에 익숙해지면서 군데군데 있는 예쁜 조약돌을 찾아내는 것. 그렇게 나의 불완전함을 감각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간다. 나를 추켜세우기 위함도 아니고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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