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연희예요. 상담을 마친 이후 저의 이야기를 편지로 전합니다.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던 날, 제가 물었죠. 저는 아직 하루하루가 편하고 행복하진 않은데 상담을 마쳐도 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상담의 마지막도 완벽해지려고 하는 거예요, 연희 씨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그 한 마디에 저는 용기를 얻어 상담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과의 넉 달 동안 저희가 가장 많이 이야기한 건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기였고, 저는 분명 불완전한 저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날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어쩐 지 제 가슴에 가시처럼 남아 있었어요. "연희 씨는 왜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거예요?" 매시간 질문 하나를 가져가곤 했던 제가 마지막으로 가져가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여러 번 곱씹어보는데도 잘 모르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뭘 위해 그렇게 나의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건지요. 그저 자신이 가진 고유의 색깔을 잘 살린 사람들이 빛나 보여서 나도 그렇게 빛나 보이고 싶었던 걸까요? 그저 나도, 나도 하는 마음? 아니면 내 안에 있는 싹을 재량껏 틔우지 못한 채 영원히 묻혀 있을까 아쉽고 조급한 마음이었을까요. 왠지 둘 다 꼭 맞는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질문 하나를 어렴풋이 마음에 품은 채 저는 다시 매일매일을 살았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제가 책을 만들고 있다고 했었죠? 선생 님과 상담을 마치고 며칠 뒤 제 책의 샘플이 나왔답니다. 속도를 올려 책 작업을 마무리할 겸, 일상에서 벗어나 저를 돌볼 겸 혼자 부안으로 3박 4일의 여행을 떠났어요.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떠나 푹 파묻혀서 글만 쓰다 돌아올 생각이었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즐겁게 떠났으나 아주 외롭고도 충분했던 여행이 되었습니다. 처절하게 혼자였기에, 그 무엇도 보고 듣지 않고 저만 바라봤기에 저 밑바닥의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보고 말았거든요. 선생님, 진짜 다시 인정하기 싫었는데 저는 아직 온전히 괜찮은 게 아니었어요. 저는 여전히 특정한 누군가에게 제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어 했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표면으로 끄집어내니 선생님이 던진 질문에 채워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짜증 날 정도로 모든 아귀가 맞춰지는 걸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스스로 발전을 위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싹 틔워 내고자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게 아니라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네요. 자연스럽지 못하고 애쓰고 있었고요. 실은 제 몸은 이미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너 힘들게 애쓰고 있다고요. 나름의 자랑이던 피부는 이유 모를 트러블로 가득해졌고, 생리불순은 몇 개월째 이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고작 '나 괜찮은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였다니. 매일 명상도 하고 글도 쓰며 마음을 들여다보고 산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겉핥기만 한 셈이었나 봐요. 내 마음을 하나 들여다보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인 건가요? 솔직히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해요. 뭔 놈의 마음은 이렇게 복잡하고 알아차리기 어려운 건지. 제 마음이 유독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 마음을 깨닫게 되니까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는 거예요. 모든 것을 하고 싶었던 제가 모든 것을 놓고 싶었어요. 일단 이런 나를 좀 달래야겠으니, 그럼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11월 말까지 모든 걸 마치고자 했던 책 작업도 놓기로 했고, 블로그 포스팅도 안 하고, 책도 안 읽고 심지어 운동도 안 가기로요. 그 어떤 자극도 받기 싫어 눈 뜨면 켜던 SNS도 삭제했어요. 스스로는 무자극 기간이라고 불렀던 기간이었습니다.
번아웃이 온 사람처럼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어느 순간 운동은 다시 해야겠더라고요. 사람이 운동을 안 하니까 회복이 되는 게 아니라 지구 핵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 뭐, 이 기회에 아예 핵까지 뚫고 와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렇게 운동을 다시 나가다 보니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어 그 책만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또 순간순간 글이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럴 때만 아무렇게나 짧은 글을 썼어요. 그 외엔 가만히 누워 있거나 명상을 하거나 사랑하는 엄마, 아빠랑 저녁 공원 산책을 하는 작은 낙에 기대어 매일을 보냈네요.
무엇 하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침이 되는 건 하지 않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애쓰고 있는 모든 것들을 놓았고, 그러다 보니 문득 또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좀 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을요. 아주 조금씩 돌아오는 피부를 보며, 다시금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대자연의 감사함을 느끼며 마음의 흐름이 조금 안정적인 궤도로 올라왔다고 확신을 했고요.
선생님 요즘의 저는 그냥 매일을 살아요.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고 무엇이 되려 하지 않고 그저 매일매일 주어지는 범위 안에 몰입해서 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사는데도, 딱히 목표지향적으로 살지 않고도 요즘은 소소하고 꾸준하게 행복하다고 느껴요. 깊게 고민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괜찮지 않아요. 여전히 때때로 마음이 조금 아파서요, 그럴 때는 이전처럼 마음을 애써 다독이기보다는 증폭기를 대고 더 감정을 들이부어서 밖으로 꺼내요. 그러면 또 그 감정은 떠나가요. 감정은 어쩔 수 없이 안아야 하는 나의 일부라고 생각했었는데 길을 터주면 흘러가는 물이더라고요. 비워야 또 채울 수 있으니 저는 앞으로도 계속 비워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 요즘 저는 아직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서 괜찮게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왠지 조금 유치하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해요.
아 또 제가 스스로 뿌듯했던 것 중 하나는요, 좋기만 할 줄 알았지만 공허하고 슬프고 외롭기 그지없었다던 그 여행에서요. 그렇게 외로워하면서도 순간 부는 바람, 아침 바다 윤슬, 사장님의 샌드위치, 만조 파도 소리 등 순간순간에는 또 충만한 위로를 받았다는 거예요. 하필 아무도 곁에 없는 시간,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마음을 고스란히 아프게 마주하면서도 순간을 누릴 줄 알게 됐다니 저 조금은 컸구나 싶었거든요. 작은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점은 선생님과 이야기했던 저의 큰 장점 중 하나잖아요. 그렇죠?
선생님과의 대화와 마지막 질문을 시작으로, 아주 외롭고도 충분했던 여행을 계기로 하나의 답을 찾았고 또 2020년 가을의 제가 되었네요. 결국 두서없는 편지가 되고 말았지만, 항상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언젠가 또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또 괜찮을 것 같아요. 이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을게요. 선생님도 편안하게 건강하게 잘 있으시길 바라요. 그럼 언젠가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고맙습니다.
2020년 11월 17일 연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