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onee Aug 26. 2020

그저 알기만 하면 된다

두서 없지만 꼭 남기고 싶었던 마음의 기록



며칠 전 밤엔 엄마를 모시고 응급실을 다녀왔다. 그제 먹은 어리굴젓이 좀 이상하다고 하더니 결국 탈이 났던 것이었다. 단순한 장염이라 큰일은 아니었지만 거실에 힘 없이 쓰러져 있던 엄마, 환자복을 입고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내가 모르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 같아 괜히 울컥하고 무서웠다. 아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을 느꼈을 테다. 별 말은 안 하지만 자꾸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고 아침 일찍 일어나 묵묵히 죽을 끓이고 있는 걸 보니. 다행히 엄마는 상태가 많이 좋아진 채로 금방 퇴원해서 아침엔 꼭 쥐고 있던 마음을 조심스레 놓을 수 있었다. 평소와 비슷함에 새삼스레 감사한 아침. 



다 같이 죽을 먹고 엄마 약도 먹이고, 조금 괜찮아졌다 싶으니 아빠가 산에 가고 싶다고 한다. 내가 약간 흥미를 보이자 금방 신이 나서는 "갈래?!" 하는데 참, 거절할 수가 있나. 피트니스 센터도 이제 하계휴가라 한동안 운동도 못할 테니, 갈 수 있을 때 등산이나 가야지 싶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무거운 구름이 덮은 날씨, 이거 하나만 아니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비 맞을 권리"를 부르짖으며 평소에도 비 맞는 걸 좋아하는 아빠의 행동에 은근히 동참해보고 싶었으니, 비가 내려도 그런대로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금세 돌아선다. 







그렇게 가게 된 두 번째 계양산. 평소 같으면 차로 가득했을 주차장이 텅텅 비었다. 비가 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흐린 날씨니 당연지사였다. 사람들 없이 고요하게 등산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자, 날씨만 좋았으면 싶었던 나는 어디 갔는지 신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산은 그냥 어떤 날씨든 다 그런 분위기대로 잘 어울린다. 이 날의 계양산도 그랬다. 흐리고 비 오는 게 잘 어울렸던 계양산. 






계양산에는 연속된 계단이 약 700개 정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걸어 올라가려다 천천히 올라가는 아빠의 속도에 발을 맞춘다. 끝까지 잘 올라가려면 처음부터 힘을 빼지 말라던, 지난번 등산 때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갈 길이 머니 그럴수록 더 천천히, 힘 빠지지 않게 차근차근. 말없이 올라가다 아빠에게 "아부지, 허벅지 뒤에 힘줘서 올라가고 있지?"라고 물으니 종아리에 힘을 실어 올라가는 중이라고 한다. 피트니스 센터 선생님에게 배운 얕은 지식으로 그러면 안 된다, 계단은 허벅지 힘을 이용해서 올라가야지 운동이 되는 거라고 말하니 앞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백 계단쯤 올라가니 아주 죽을 맛이라는 말과 함께. 







정상에 올라설 때 즈음엔 비가 아주 세차게 내렸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경사진 흙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 덕에 산에서 듣는 빗소리는 훨씬 풍성하다. 이대로 가만히 빗소리만 듣고 있어도 정말 좋겠단 생각을 했다. 







평소엔 진지한 대화를 잘하지 않는 아빠랑 산을 올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다. 아빠는 앞장서서 걸으며, 나는 뒤에서 따르며. 앞을 걸어가는 아빠가 말했다. "우리 딸은 내가 보기엔 자신감만 조금 키우면 돼. 정말 자랑스러운 딸이야. 조금 더 너에게 자신감을 가져, 그래도 돼 충분히." 순간 울컥해서 비죽 입꼬리가 내려가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가 뒤돌아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울컥한 얼굴을 지워버린다. 


평소 둘째, 셋째 칭찬은 해도 내겐 유독 칭찬에 야박한 아빠다. 사랑하는 마음은 내게도 매한가지라는 걸 알기에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아빠에게까지 저 말을 들으니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바는 결국 한결같다는 걸 깨닫는다. 나의 장점과 내가 가진 것들을 나만 모르고 있다는 것. 나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 


앞으로도 아빠랑 종종 둘이 등산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2주 만에 상담을 다녀왔다. 벌써 상담도 10회 차를 넘었다. 주 1회 가던 상담을 앞으로는 2주에 한 번씩, 그리고 더 괜찮아졌다 싶으면 한 달에 한 번, 그리고는 이 상담을 종결을 짓자고 했다. 선생님은 연희 씨가 자신감을 많이 되찾은 것 같다고 했다. 열심히 참여해 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처음 왔을 때 모든 게 두려워서 울던 나의 시간도 그만큼 지나갔다. 어떤 일에 끝이 있던 건 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여전히 오락가락하면서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알 것도 같다. 이유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내게 없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에 더 집중하기 시작하는 요즘,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은 무언가를 지닌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앞으로 더 온전하게 알기 위해서는 부단히 마음의 습관을 만들어야 할 테지만. 그래도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나만큼 열렬히 자신을 마주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나. 그러니 그냥 알기만 하면 된다. 그저 충분하다는 걸 알기만 하면 되니, 한편으로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싶다. 모든 게 그냥 그렇게 나의 마음에 달려있나 보다. 20대의 끝자락에 알게 된 가장 감사한 앎을 글로 남기며. 













이전 15화 선생님 저는 괜찮지 않아서 괜찮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