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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ee Feb 10. 2022

거절의 달

코리빙 라이프스타일 관찰기 04



E와 연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두 사람이 코리빙하우스에서 살 때 가장 치명적인 점은 거절을 잘 못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이 둘은 영화 <듄> 아이맥스 버전을 보러 가기로 했다. 다만 인기가 너무 많은 영화인지라 28시에 시작하는 영화를 예매했다는 게 문제였다. 둘은 생전 처음 듣는 28시가 너무 웃기기도 하고, 주말이니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게도 거절을 못 해 이게 맞나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날, 제 3자가 이건 미친 짓이라며 (감사하게도) 나서주었다. 우리는 멱살 잡고 끌려가는 척, 실은 마음 편하게 영화를 취소했다.


거절을 못 하는 이 둘의 연장선에 있는 다른 문제는 서로를 너무 배려한다는 것이다. 연희는 사실 그 영화를 보러 가는 게 크게 내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괜히 미안해 다른 영화라도 보자고 했다. 코리빙하우스 안 작은 영화관을 빌려 보면 딱 맞으리라. 간과한 점이 있다면 코리빙 하우스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공용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이미 공간 예약이 다 차 결국 토요일 새벽 5시 타임을 예약했다. 아이맥스를 보러 다녀오는 공수만 없어졌을 뿐, 미라클 모닝 마냥 일어나 영화를 보는 건 매한가지였다. 둘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금요일 밤엔 다음 날 새벽 영화를 보기 위해 일찍 자려고 했지만 결국 밤 12시에 와인을 마시자는 친구 N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다 같이 와인을 마셨고, 이럴 바에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 밤이나 꼴딱 새고 가자는 누군가의 말에 또 토를 달지 않고 밤새 얘기하다 시간이 되어 둘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그날은 <이터널 선샤인>을 봤다. 서로 잠잘 타이밍을 보는 건지 영화를 보는 건지 눈치를 보는 듯 눈치를 주는 듯했으나 결국 둘 다 꽤 열심히 영화를 봤고 다시 봐도 정말 좋은 영화라며 각자 마음에 든 장면과 문장도 나눴다. 아침 6시였다. 자러가기도 일어나기도 애매한 그 시간, 연희는 산책을 제안했고 E는 역시나 거절하지 않았다. 벌써 해가 늦어지는 초겨울,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둘은 근처 성북천을 따라 걸었다.


“요즘은 어쩐지 저를 잃는 듯한 기분이에요.”
“저도요. 처음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마냥 즐겁고 좋기만 했는데 매번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내 시간 보내야지 하다가도 거절을 잘 못해서 그냥 같이 있어요.”


역시나 같은 마음이었던 둘.

 
“흠 그러면 저희라도 거절하는 연습 할래요?”
“좋아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 외치는 거로 해요.

대신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아니까 절대 상처받지 않기.”
“좋았어. 이번 달은 우리에게 ‘거절의 달’인 거예요.”
“거절?”
“오키!”



새벽 6시의 성북천.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침의 하늘을 봤다.



함께 살아가는 코리빙하우스에서 타인과 나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거절. 서로 잘 거절하는 것부터 시작해 타인에게도 거절을 넓혀가 조금씩 나의 시간을 늘려가고자 했으나, 그달에는 서로한테만 거절을 잘하게 되어 둘만 만나지 못한 건 서로에게 판 가장 큰 함정이었을까. 수확이라면 여럿이 모여 있다가도 둘 중 한 명이 저 갈게요! 라고 거절 신호를 날리면 나머지 한 명도 정신 차리고 저도 이제 슬슬 갈래요! 하고 따라나선다는 것이다.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라는 적정선을 찾을 때까지는 둘 성격상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분명한 건 더 건강하게 어울리고자 조금 멀어지는 법을 택했다는 것. 여전히 ‘따로 또 같이’ 잘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코리빙 라이프스타일 관찰기]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나오면 우연히 마주하는 이웃에게 안부를 묻는 곳, 코리빙하우스. 연희와 테드는 같은 코리빙하우스에서 사는 이웃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으로 코리빙하우스에서 '따로 또 함께' 살아가는 여러가지 모양새를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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