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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다

너의 냄새를 기억하다

by 연하일휘

손 끝의 떨림이 전해진 것일까, 혹은 손 끝까지 이어졌던 것일까. 익숙한 불안 증세가 온몸을 웅크리게 만든다. 가슴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이 감정은 흘려보내기도, 그렇다고 억누르기도 쉽지 않다. 평소라면 모자 하나만 눌러쓰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을 것이다. 오늘은 그 선택지마저 미뤄두게 만드는 무기력함까지 겹쳤다.


눈물이 배어 나올 것만 같은데, 터트리지도 못하는 날. '까닭 없이' 간간이 찾아오던 불안이 요즘은 몇몇 단어들을 기폭제 삼아 자주 터져 버린다. 좋은 일이잖아- 그래, 나쁜 일들이 아니잖아. 왜 그러는 거야. 고작 단어 하나일 뿐인데, 옛 기억들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탓에 답답함이 더해진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나 자신에 대한 미움마저 불안 위로 덧씌워진다.


겹경사다. 언니와 여동생의 출산이 다가온다. 1월과 4월, 나는 두 조카를 맞이한다. 언니의 임신 소식에 엄마는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내비쳤었다. 언니가 아픈 손가락이라던 엄마는 눈물 어린 목소리로 잔뜩 들떠 있었었다. 여동생의 둘째 소식까지 이어지니, 엄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었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엄마와 언니, 두 단어가 더해졌을 때에만 눌리던 트라우마 버튼이 어느새 한 단어만으로도 눌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는 부모님과 언니의 다정한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작은 부딪힘이 높아진 언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방관자로서의 죄를 묻듯, 나를 향한 날 선 목소리가 생채기를 남긴다. 언니의 이른 독립으로 균열이 생겨났다. 엄마는 자책을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언니가 너무 이르게 홀로서기를 하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물리적으로 멀어진 거리만큼 접점이 사라지고, 부딪힘이 사라져 가자 엄마의 자책과 원망이 섞여 그 원형을 찾기 어려워졌다. 다 자신 때문이라던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위로하다가도, 자식들 다 필요 없다며 밀어내는 엄마의 말에, 나는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아버지가 쓰러지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언니가 먼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니는 어렸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려왔다. 어린 시절의 아픔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의 이별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 앞에서 마음을 다잡았다는 말을 전해왔다. 어려웠다. 선을 긋고 지내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부모님이 기뻐하니까. 그 긴 시간들을 억누른 것은 단순한 이유들이었다.



"그땐 다들 어쩔 수 없었어."



맞아.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얽힌 실타래의 시작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 문장으로 서로에 대한 아픔들을 눌러 나갔다. 이제부터라도, 앞으로라도. 아팠던 시간들 이상으로 좋은 시간들을 만들어나가면 될 테니까. 채 다 억누르지 못한 듯, 간간히 언니는 어린 시절의 엄마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원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랬지- 우리는 그렇게 다시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언니의 임신 소식을 들었던 날, 엄마는 집으로 찾아왔다. 여동생과 함께 집 앞 카페로 나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가슴속 울렁거림이 시작됐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 여동생은 괜찮다며. 좋은 일이라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다독여 주었지만. 나는 그날 밤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어렴풋이 과거의 트라우마가 촉발된 것임을 깨달았지만, 다시 무뎌지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소한 서운함들조차, 흘려보내도 되는 일들조차 하나씩 쌓여나간다. 언니와 엄마의 대화 속에서 흘러가는 사소함들이 내게로 전해질 때마다 과거의 감정들이 새어 나온다. 이제는 괜찮은데, 예전과는 다른데. 이성적인 판단이 무색하게도 감정이 먼저 튀어나와 버린다. 대화가 두려워진다. 좋고 나쁨의 분별없이, 단어만으로도 불안의 시작점이 되었다.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뒤늦게서야 반발하며 튀어 오르고 만다.



참 이상하다. 스스로의 감정에 잠식되다가도, 작은 손을 한 번 쥐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찾아온다. 그 작은 몸을 안아 들 때면, 새어 나올 것만 같던 눈물조차 웃음 뒤로 사라진다. 나보다는 조금 높은 듯한 체온, 피부 위로 와닿는 그 따스함이 울렁이던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조카를 품에 안을 때면, 그 작은 손을 잡고 허리를 숙인 채 함께 걸음을 옮기다 보면 숨통이 그제야 트인다. 아직 이모 발음이 되지 않아 '움무'라며 부르는, 잔뜩 신이 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면 웃음이 먼저 나오고 만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던 불안들이 체온이 닿는 순간마다 따스함으로 뒤덮인다. 마주친 눈이 과거에서 현재로 나를 끌어올린다. 네가 있는 현재가, 네가 자라날 미래가 불안이란 과거 위로 싹을 틔운다.



"이제 아기 냄새가 나질 않네."



조카를 품에 안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다 깨닫는다. 매일 맡는 냄새라서 그런 걸까. 아기 냄새가 사라진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네 냄새가 무엇인지, 이모는 알 것 같지만. 좋은 일들 사이에서 나 홀로 방황하던 그 시간들이 천천히 흘러간다. 나는 네 품 속에서 숨을 쉰다.





by.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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