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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보다

너에게서 배우다

by 연하일휘

"쌤은 눈치가 빠른 것 같아요."


언젠가 딱 한 번 들었던 말이다. 글쎄요... 말끝을 흐리며 다른 화제로 말을 넘긴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다. 내가 눈치가 빠를 리가 없다. '눈치를 본다'는 말이 적절하겠지.


타인의 표정과 눈빛과 말을 들으며 진심을 파악하고 속뜻을 유추하는 일은 어렵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상대가 기분이 나쁜지, 화가 났는지. 부정적인 감정을 잡아내는 것뿐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단순하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긍정적인 상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연기와 거짓말이 서툰 나만 하더라도 긍정적인 것처럼 꾸며내는 것 정도는 할 줄 아니까. 과도하게 '눈치를 보는', 극소심한 성격은 부정적인 감정에만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가장 긴 시간을 공유한 가족들에게는 좀 더 예민한 눈치 레이더가 반응한다. 그동안 쌓여 온 감정들의 기록들이 보다 정확한 값을 인출해 낸다. 표정과 목소리, 작은 제스처들의 의미들을 읽는다. 오늘 오전, 아버지의 머뭇거림에서는 아쉬움과 그리움과 같은 감정들이 숨어있었다.


집 앞에 도착한 아버지는 차에서 내리기 싫은 듯, 정면만을 응시한다. 뇌졸중으로 언어장애가 오고, 다시 찾아온 뇌졸중은 인지장애로 이어졌다. 가족들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내뱉는 한 두 음절의 단어로 그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여보, 집에 안 갈 거야? 어머니의 말에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어디 가고 싶어? 응. 어머니가 여러 장소들을 나열하지만, 아버지의 고개는 좌우로만 흔들릴 뿐 긍정의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별다른 소득 없이 가만히 차 안에 앉아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선다.


운전을 하던 중에 아버지가 여동생이 준 조카 사진이 새겨진 방향제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리셨음이 떠오른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가 손지 보고 싶으신가 봐-


조카의 하원길을 마중 나가고 싶어 퇴근길을 서두른다. 아슬아슬하게 조카의 하원 차량보다 조금 더 이르게 집에 도착한다. 차 문이 열리고 눈이 마주쳐도 심드렁하니 카시트에 앉아 있던 조카는 선생님이 안전벨트를 풀어 주자 차 밖으로 뛰쳐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내던진다. 이모 품 안에 안긴 채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하던 조카는 이모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다. 품에서 내려놓자 다시 아장거리며 이모의 품으로 와 안긴다.



"우리 함미, 합삐 보러 갈까?"


"함미! 합삐!"



조카의 목소리가 잔뜩 신이 났다. 외가댁에 도착하자 다시 '함미, 합삐'를 외치며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달려간다. 날도 추운데 왜 왔어- 거실에 앉아 아버지와 TV를 보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어둡다. 품 안으로 안겨오는 조카의 모자와 외투를 벗겨주더니, 바닥이 차다며 신발은 그대로 신겨둔다. 평소라면 상기된 목소리로 손지를 안아 들었을 텐데, 오늘은 목소리도 가라앉아있다.


조카는 강아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앨범에 사진을 끼워두는 여동생 곁으로 가 사진들을 구경한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위해 여동생이 주기적으로 '손주 앨범'을 채워주는 중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 앉아 조카는 자신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함께 구경한다. 그러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간식을 꺼내 들고 할머니에게 가져간다. 양손에 과자 하나씩을 쥔 채 한 두입을 먹더니 까치발을 하고 할아버지에게 과자를 먹여준다. 다른 손에 쥔 과자는 이모에게도 한 입, 그리고 엄마도 한 입. 다시 과자 한 봉지를 꺼내선 할머니에게 향한다.



"이그, 안 먹을 거면서."



타박하는 말과는 달리 다시 과자를 까서 조카 손에 쥐어준다. 어느새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조카를 바라보며 추임새도 넣어 주며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슬슬 연락올 때가 되지 않았나..... 흘려보내듯 내뱉는 말에 여동생이 적절한 대답을 내놓는다.



"이제야 수술하고 정리 중이라 정신없을 거야."



오늘은 언니가 아이를 출산하는 날이다. 오후 4시 수술, 어머니는 요즘 기술이 좋아졌으니 걱정할 일 없다며 형부에게 말을 꺼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머니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히잉, 함미. 함미."



어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 앞에서 조카가 칭얼거린다. 그 소리에도 할머니가 나오지 않자, 조카가 나에게 안아달라 조르며 빨리 할머니를 불러달라 재촉을 한다. 조카의 소리에 급히 화장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표정이 밝다. 할미 쉬야도 못 하게 해- 조카를 안아 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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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에게 어머니 출근을 부탁드리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후, 가족 단톡방으로 형부의 연락이 왔다.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과 함께, 출혈이 많아 언니가 수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연락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카톡을 보았느냐는 물음을 건넨다. 응, 봤어. 응. 나중에 연락할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안심과 불안이 함께 공존한다. 작은 불안이 건너온다. 요즘 기술이 좋아져서 괜찮을 거야- 어머니가 했던 그 말을 다시 되뇌인다.


아쉬워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이 아른거린다. 조금 더 있을걸. 어머니 출근을 직접 시켜드리며 손지와 좀 더 오래 있게 해 드릴걸. 퇴근 후, 나의 피곤함 때문에 이르게 집으로 돌아와 버린 나를 탓한다. 더 길게 있었다면 그 연락을 함께 받고,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품 안에 안긴 조카를 토닥인다. 내일은 부모님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들이라도 사 들고 가자. 죄책감이 나를 잠식하기 전, 밝게 웃는 조카의 얼굴로 가라앉는 감정을 애써 끌어올린다. 나의 손길에 맞춰 조카도 내 가슴팍을 작은 손으로 토닥인다. 아가들은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다던데. 가라앉지 않으려, 위로 올라오기 위해 잔뜩 발장구를 치는 이모의 감정을 네가 가장 잘 아는가 보다. 이럴 때마다 더 환히 웃어주는 것을 보면 말야.


눈치가 빠른 우리 조카. 그래서 오늘 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살가웠나 보다. 그래서 더 그 품 안에 안기고 어리광을 부렸나 보다.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함께 웃으며 동생을 기다리자고 말야.


눈치만 보던, 부정적인 감정에만 예민하던 이모가 네게서 또 하나를 배워간다. 그건 나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느낀다면, 위로를 건네줄 수 있다는 거니까. 마치 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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