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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행복했다고.

기분 좋은 피곤함만.

by 연하일휘

작은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러트린다. 한 겨울이건만, 봄날씨와 같은 포근함이 세상을 가득 메웠다. 햇빛에 달궈진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다. 조금 내린 창문으로 스며든 바람이 피부에 와닿고 난 뒤에야 숨통이 좀 트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찬 공기로 채워본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을 짓누르는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전 출근을 시작한다. 어제저녁, 은빛을 채워 넣으며 예쁜 구를 형성하는 달을 벗 삼아 퇴근했다. 그 정취에 빠져든 것일까,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며 결국 3시간도 잠들지 못한 채 출근길에 나선다. 천천히 녹아내리며 의자로, 바닥으로 몸이 달라붙는다. 목으로 찾아오는 통증에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져간다. 출근길에 사 들고 간 커피가 바닥을 보인다. 홍차 티백 하나를 우려내며 잠시나마 기운을 북돋아주길 바라며 숨을 가다듬는다.


매 수업마다 불만족스러운 점들이 하나씩 생겨난다. 나의 피로가 수업에 영향을 미쳤다. 퇴근 후에도 해야만 하는 일들도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퇴근하며 쉴 수 있다는 만족감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더 커져버린다. 마치 봄날처럼 따스한 날, 움츠리지 않고 편히 걸을 수 있는 좋은 날임에도 몸과 마음음 점점 가라앉는다.


장을 보고 와야 하는데-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이다 무기력으로 귀결된다. 모든 일들을 미뤄두고, 그저 웅크린 채 쉬고 싶다. 집 앞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난 뒤, 잠시동안 운전석에서 이마를 짓누른다. 작은 두통이다. 도돌이표처럼 오늘 하루, 나의 실수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반쯤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어귀, 내 허벅지께 정도 크기의 하얀 것이 꼬물거린다. 털모자를 쓰고 도톰한 하얀 패딩을 입은 조카가 여동생과 집 앞 탐방 중이었다.


"날이 너무 따뜻하길래, 잠깐만 걸으려고."


대문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조카를 부른다. 이리 와- 이모 안아- 조카는 얼굴만 잠시 바라보더니 다른 곳으로 종종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집 앞 산책이지만 신이 난 탓에 이모가 보이지 않는가 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려 하자 여동생이 조카를 안아 든다. 엄마의 품에서 조카가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향해 계속해서 팔을 뻗는다. 조카를 품에 안자, 눈물방울 맺힌 얼굴로 방긋 웃으며 내 뺨을 간질인다. 햇빛 아래에서 밝은 웃음이 흩뿌려진다.


빠빵, 빠빵.


조금 더 걷게 하려고 조카를 내려놓으니 자동차 문 손잡이를 열기 위해 낑낑대며 안간힘을 쓴다. 손이 닿질 않으니 내 손가락을 잡고 차로 끌고 간다. 드라이브 겸 마트라도 다녀오자- 결국 조카의 애교에 차 시동을 켠다.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차 안 공기가 포근함으로 바뀐다. 아가가 춥지 않겠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온기가 다르게 다가온다. 짧은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온 집, 조카를 품에 안은 채 책 몇 권을 읽어준다. 자동차를 찾겠다며 책장을 급히 넘기던 예전과 달리 이모의 목소리를 들으며 책에 시선을 고정한다. 간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칠 때마다 조카의 보들한 뺨에 입을 맞춘다.


목으로 오던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엄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조카가 작은 손으로 감싸 쥔다. 이모를 방으로 끌고 가서는 좋아하는 인형을 안고선 품 안으로 달려든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뺨에 닿는다. 인형에 얼굴을 부비다 이모의 가슴께로 얼굴을 파묻는다. 머리와 엉덩이를 감싸며 너를 안아 든다.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너의 무게에 눌린 것일까. 품 안에서 옹알이를 하는 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이모는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더라. 아가의 체온이 전해진다. 네 덕에 이모는 오늘 하루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 좋은 피곤함만 남은 하루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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