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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봄이 오면.

by 연하일휘


폐 속에 눅눅한 공기가 잔뜩 들어찬다. 건조한 날씨에 내리는 비는 기분좋은 촉촉함을 건네줄 줄 알았는데, 온 집안에 끈적거리며 들러붙는다. 비와 습도의 문제는 아닐 듯하다. 며칠간 잠을 잘 이루지 못해 이어지는 컨디션 난조가 비를 조금 더 거부하게 된 것이 원인이다.


어제는 작은 빗방울들이 이어지는 날이었다. 날이 춥지는 않았지만, 강아지 산책은 꽤나 고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춥지 않지만, 강아지는? 노견이 되어버린 아가가 한 번 아프면, 누나의 눈물샘을 터트리곤 하다보니 결국 산책은 포기를 했다. '이정도는 괜찮잖아!'라고 외치는 듯 어리광을 부리는 아가를 달래주느라 고생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내린 흔적들이 군데군데 묻어나 있지만, 빗방울이 그쳤다. 여전히 흐린 하늘은 언제 쏟아내릴지 모르는 비를 머금고 있지만, 변덕을 부리기 전에 강아지와 이른 산책을 나선다. 공기가 포근하다. 물기가 가득한 공기는 찝찝함보다는 촉촉한 따뜻함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날씨에도 공사를 하는지, 가까운 곳의 공사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바자닌다. 별다른 소리 없이 사람들의 움직임만 있는 것을 보면, 일을 진행할지 고민 중인건가. 공사를 하루 쉬게 된다면, 조금은 조용한 오전이 될테니 나는 좋은데.


하루의 산책을 건너 뛴 만큼 오늘은 강아지의 발걸음이 다급하다. 영역 표시도 야무지게 하고, 새로운 냄새가 밴 곳은 없는지 확인하느라 오늘만큼은 누나가 뒷전이다. 종종 뒤처리를 하느라 멈춰서면, 저혼자 튀어나가려던 강아지가 목줄에 잡혀 아쉬운 눈초리를 보낸다. 왜애, 빨리 가자. 젖은 땅을 밟느라 슬리퍼를 신고 나온 누나의 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빨리 가자며 보챈다. 비가 왔다 하더라도, 네 삶의 낙인 산책을 건너 뛴 건 누나 잘못이 맞지.


촉촉한 포근함을 선사하던 공기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눅눅함으로 바뀌어버렸다. 찐득하게 느껴지는 장판, 그리고 분무기로 분사하는 듯한 습도가 피부로 와닿는다. 역시 비 온 뒤의 느긋함은 밖에서만 즐길 수 있나보다. 창문을 열어두며 공기가 자리를 바꿔주기를 기다린다. 바깥 공기가 들어선다면, 그래도 조금은 쾌적해지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햇빛이라도 조금 비추었으면. 온 몸으로 달라붙어 무기력증을 유발하려는 요 습기 녀석들을 조금만 데려가 주면 좋을텐데 말야.


강아지에게 개껌 하나를 물려주고선 마당으로 나선다. 군데군데 고인 물웅덩이로 흐린 하늘이 비춰진다. 파란 하늘이었으면 더 예뻤을텐데, 시멘트 바닥에 비친 회색빛 하늘은 영 음울함으로만 다가온다. 멍하니 물웅덩이들을 바라보다 파문이 이는 것을 보고 하늘을 바라본다. 빗방울은 내리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잠시 일렁이던 수면은 이내 잠잠해진다. 바람이었나, 혹은 채 갈무리하지 못한 빗방울 하나였나. 세상에 '완벽'이란 것의 존재가 흔치 않으니, 구름이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638150847245696958_0.jpg Pixabay



찝찝함을 몰아내려 멍하니 마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혹시 또 파문이 일어날까, 물웅덩이를 쳐다보지만 이후부터는 묵묵부답이다. 혹시 구름의 실수가 아니라, 이내 사라져버릴 존재라서 아쉬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미안하지만. 네가 아쉽다해도 작별인사는 해야해. 네가 거기 계속 있으면, 또 그곳만 미끄러워진단 말야. 넘어지기라도 하면 책임 못 질 거잖아.


머릿속으로 실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다 토닥거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간식을 다 먹고 누나를 찾으러 온 강아지가 현관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래, 그래. 누나가 안아줄게. 잠시간의 멍때리기가 끝이 난다. 슬슬 비가 그치려나보다. 군데군데 옅어진 구름들 사이로 밝은 빛이 조금씩 내리쬐려 한다.


봄이구나. 이젠 비가 와도 추워지지 않고, 오히려 꽃들이 움트는 봄이구나. 비든 햇빛이든 뭐든 괜찮다. 너무 추워지지 않았으면, 그리고 너무 더워지지 않았으면. 온전히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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