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동안, 100번째의 글.
"난 보랏빛이 좋아."
보랏빛의 향이 강렬하다. 골목을 접어들며 코 끝으로 달라붙는 진한 향기는 인위적인 향으로 착각할 만했다. 꽃향기를 액화시켜 잔뜩 흩뿌려놓은 듯,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자연 그 자체의 향을 마주한다.
라일락의 자태가 향 위로 덧칠된다. 꽃향기가 보랏빛으로 느껴진다면 우스운 일일까. 익숙하지만 낯선 이 향기를 표현할 말이 달리 없다. 회색빛 담으로 둘러싸인 골목 어귀에서 흩뿌려지는 보랏빛 향기는 한 소녀가 내뱉었던 문장을 떠오르게 만든다. 소나기처럼 짧지만 순수했던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보랏빛으로 뒤덮인다. 보라색은 소녀의 죽음을 의미하는 색상이야- 비극적인 결말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우리는 중2스러웠지만, 중2병을 경계하던 어린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위해 외우던 상징은 어느샌가 변질되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보라색은 사이코패스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래- 그 누구의 입에서 새어 나왔는지 모를 그 문장은 보라색과의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상관없어. 나는 까만색이나 저 깊은 바다마냥, 짙푸른 색을 좋아하니까. 변치 않던 색상의 호불호는 몸과 마음의 성장에 따라 같이 변화해 나갔다. 짙은 청록색에 대한 애정으로, 밝은 민트색에 대한 애정으로, 그리고 은은한 따스함을 품은 연보랏빛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보랏빛을 좋아해 작은 물건들을 수집하던 친구는 어느새 방 한 편을 물들였다. 옅은 보랏빛이 맴도는 물건들이 제각기 자리를 차지해 만들어낸 어우러짐이 어여쁘다. 거리를 두었던 색상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생겨난다. 네 덕분에 나도 보라색이 좋아지는 것 같아- 친구는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글을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하던 나의 등을 떠밀어주던 친구가 말을 꺼낸다. 그땐 내 삶이 비극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래서 보라색이 더 좋아진 걸까?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눈물을 떨구거나, 함께 터트렸던 울음들이 쌓여 관계를 이루었다. 다르지만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는 것은 깊은 이해와 안타까움을 낳는다.
나는 네가 떠나기를 바랐어. 지금도 네가 희생으로 네 삶을 채우지 않기를 바라. 담담한 목소리에는 작은 분노마저 서려있다. 지금은 괜찮은걸. 함께 눈물을 흘리던 친구는 나의 아픔을 마주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넘어선 감정들을 전해준다. 네가 있어서, 그래서 더 괜찮은 것 같아.
손끝으로 엮어나가는 글자들의 조합이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만들 때마다 느꼈던 즐거움이 어느새 질투와 열등감이라는 지저분한 감정들로 뒤덮였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들은 결국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작은 기계 너머로 글자들과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어깨 위로 손을 얹는다.
"애매한 재능에 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어. 먹고 살 정도의 재능이 아니면서, 고작 이 정도의 재능만 줄 거라면. 왜 내게 주어진 거냐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친구는 긴 방황의 시간 동안 괴로워했었다. 애매한 재능 하나만을 붙잡아도 될까.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붙잡은 재능은 눈물과 좌절들로 점철된 노력으로 꽃 피워 나가기 시작했다. 생명력을 품은 그림들이 손끝에서 태어난다. 토닥이며 말을 건넨다. 놓치지 마. 네가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을 외면하지 마. 내가 적어 내려 가는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며, 등을 떠밀어준다.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네 글은 절망을 노래하지 않아서 좋아."
눈물 젖은 목소리로 전하던 이야기들을 글로 써 내려간다. 시간이 지나며 희석된 감정들이 때때로 올라오지만,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다. 애매한 재능에도, 불투명한 미래에도 그저 묵묵히 손을 움직인다. 손을 놓고 싶은 순간에도 옅은 웃음을 지으며 네가 건네준 말들을 떠올린다.
난 보랏빛이 좋아- 비극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을 그려낸 보랏빛이 어여쁘다. 우리의 슬픈 순간들은 눈물에 깎여 아픔을 응축한 순수함으로 남았다. 나도 너를 닮은 보랏빛이 좋아. 짙은 라일락 향기가 함께 터트리던 웃음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