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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밥값은 했어.

오이 없는 김밥

by 연하일휘

"언니, 저녁 어떻게 할 거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던 중,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밥을 나눔 해주겠다는, 고마운 그 전화에 대한 답은 고민할 것도 없이 긍정이다. 김밥을 싸는 동안, 옆에서 엄마 껌딱지 모드일 조카를 돌보는 것으로 밥값을 대신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근데, 나 지금 엄마랑 다이소 와 있어서 좀 늦을 수도 있는데."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함께 외출을 한 상태라서 귀가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부지런히 걸어 다니다 들른 여동생네 집, 여동생은 이미 싸 둔 김밥 네 줄을 건네준다. 늦었다. 밥값을 하지도 못했는데, 밥이 먼저 나와버렸다. 짧은 사과를 건네고, 김밥을 해체하며 놀고 있던 조카를 품에 안는다. 뭐, 이제라도 이모가 놀아주면 되지-


이제 제법 커진 손으로 이모의 손가락 두 개를 꼬옥 쥐고선 자기 방으로 향한다. 얼마 전, 엄마 아빠가 사 준 코코지 하우스에 푹 빠진 조카가 인형 몇 개를 손에 쥐고 고민을 시작한다. 뽀오오? 크농? 그러다 마음에 드는 인형 하나를 톡- 올려놓고는 이모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눈을 마주치며 함께 배시시 웃는 시간, 잔뜩 집중한 채 귀를 기울이다 단어 몇 개를 따라 말한다.


"용감한. 용감한! 용감한 00이. 용감한 이모-"


자기 이름과 이모 앞에 관형어를 붙여가며 문장을 말하는 조카가 귀여워 맞장구를 쳐 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하루하루 단어 하나씩을 익혀가며, 말이 늘어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두 돌쯤 되면, 구사하는 문장이 꽤 늘어난다 하던데,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다. 너 그때는, 간신히 두 단어정도만 붙여서 말했었는데. 네가 빠르긴 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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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들었으니, 다음 차례는 독서인가 보다. 이모 손을 잡고 쭈욱 끌어가며 거실로 향한다. 네가 돌 즈음이었나, 그때 사주었던 에듀테이블이 이젠 책상이 되었다. 엄마아빠와 서점에서 샀다는 탈것 백과사전을 펼치고, 이모에게 주문을 한다.


"못 차께써요. 뜨럭. 트럭."


"트럭 찾아볼까?"


함께 책장을 넘겨보지만, 트럭이 있는 페이지를 찾질 못하겠다. 여러 탈것들의 변천사가 사진으로 주욱 늘어서 있는데, 중장비나 스포츠카는 보이건만. 트럭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결국 다른 자동차들이 있는 페이지에서 모양을 함께 찾거나 색깔을 맞추는 놀이를 시작한다. 처음 색깔을 가르쳐주려 했을 땐, 아이가 영 관심이 없어 실패했었는데. 이제는 제법 색깔을 잘 찾기 시작한다. 이모의 과장된 칭찬 덕분에도 잔뜩 신이 나 다른 사진들에서도 색깔 찾기 삼매경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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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태어나며, 조카는 미디어 노출을 시작했다. 둘째를 출산하며 몸이 많이 상한 동생을 돕느라 부득이하게 시작된 미디어 노출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조카가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과하게 빠져들지는 않는다는 것일까. 영상을 보다가도 흥미가 떨어진다 싶어지면 안아달라 하며 자기가 직접 텔레비전 전원 버튼을 누르기까지 한다. 그리고 색깔 동요 몇 편을 보고 난 이후부터, 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과도한 미디어 노출은 아이들의 언어능력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던데, 여동생과 제부는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에서 나온 단어들을 놀이에도 활용하다 보니, 오히려 조카의 어휘력이 더 늘어나는 느낌이다. 책으로만 보던 소방차나 구급차의 일들도 영상으로 접한 이후부터, 이제는 이모에게 설명해 주고 가르쳐주려 한다. 오물거리는 그 얼굴이 귀여워 이모는 설명을 듣다가도 네 정수리에 쪽-하고 뽀뽀를 해 버리지만.


이모와 한참을 책을 보며 놀다 조카는 뒤에서 빤히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챘다. 아빠의 품에 안기며 잔뜩 애정을 퍼붓는 조카의 뒤통수를 몇 번 쓰다듬어주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예전에는 이모 집에 가지 말라며 붙잡았었는데, 이모 집착 모드가 끝나버린 것이 조금 많이 아쉽다. 흠, 그래도 이 정도면 엄마와 아빠가 조금은 쉬면서 할 일을 하는, 그런 시간을 준 거 맞겠지? 뒤늦은 밥값을 한 날, 오이를 못 먹는 언니를 위해 따로 준비해 준 김밥을 먹는다. 나쁘지 않다. 네가 태어나며, 자매 간의 관계도 조금 더 돈독해진 것만 같아서.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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