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거리는 종이가방은 가볍지만 가득 차 있다. 가방 안에서 제 갈 길을 잃은 녀석들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기 시작한다. 플라스틱을 툭툭 던져놓고, 작은 비닐 안에 다른 비닐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작은 상자들도 하나하나 정성스레 펼치며 한데 놓아 묶어 버린다. 큰 종이가방 두 개, 넘치기 직전이 되어서야 던져두었던 재활용 쓰레기들을 분류한다. 게으름과 피로가 서로를 핑계 삼은 결과물이다.
10L짜리 종량제 봉투에도 쓰레기를 꾹꾹 눌러 담는다. 거실을 어지럽히던 녀석들을 정리한 뒤에, 강아지의 배변매트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 주에 이거 한 번도 안 씻었네. 마당으로 나가 대충 휘휘 물을 뿌리고, 세제로 설렁설렁 씻어낸다. 실리콘으로 된 녀석이라 세척이 쉬운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밀대에 끼워진 정전기 청소포에는 내 머리카락과 함께 희끗한 털들이 가득 달라붙는다. 대머리가 안 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우수수 빠지는 머리칼과 사시사철 뿜어져 나오는 강아지 털이 한가득이다. 누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가의 발에 먼지들이 달라붙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귀엽긴 하다만, 이건 좀 곤란한데. 방 안에 담아두고 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놓으니, 애처로운 눈빛이 뒤통수를 콕콕 찔러댄다. 청소 끝나면 놀아줄게- 들릴 리 없지만, 아가에게서 끼잉-거리는 소리가 나기 전, 청소를 마치기 위해 조금 더 서두른다.
식기 세척기에 접시들로 테트리스를 하고, 에어프라이어 바스켓을 꺼내 한 차례 씻어내고 나니 녹초가 되어 버렸다. 한 시간 30분. 별거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저 방 하나와 신발장에 쌓여있는 잡동사니들도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아, 공기청정기도 마저 분해하고 씻어야 하는구나.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무리해서 좋을 게 없는 날이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커피 한 잔을 탄다. 커피도 피하는 게 좋을 시기이긴 하지만, 한 잔 정도는 나에게 주는 보상이다. 피곤하다. 병원에 다녀오며 쉬려고 했건만, 계획과는 많이 어그러졌다. 가끔 청소에 온 기운을 쏟는 날이 있곤 한데, 그날이 오늘이 되어버렸다. 이 정도면 그래도 깨끗해졌나. 시선을 돌릴 때마다, 정리가 필요한 곳들만 콕콕 눈에 박힌다. 집안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 하더니만. 청소를 해도 영 큰 효과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왜 청소를 안 해도 여전히 깨끗한 곳이 있는 걸까.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신기함을 넘어 속상할 정도다. 병원에서 귀를 살펴보니 급성 외이도염이 만성으로 넘어갔다. 붉었던 피부는 가라앉았지만, 붓기가 여전하다. '귀지가 덕지덕지 있어야 건강하다'라고 들었건만, 여전히 내 귓속은 참 깨끗하다. 그 이후에 귀에 손을 단 한 번도 댄 적이 없는데. 대체 왜 넌 계속 깨끗한 거야?
목과 귀의 통증으로 며칠을 앓았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애매한 통증들이 조금씩 조금씩 기력을 앗아가는 듯했다. 동네 병원 약을 먹어도 딱히 효과가 없어, 먼 곳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다시 찾았다.
"전에 역류성 이야기 했었죠? 식도염도 있고, 후두염도 있고."
의사 선생님이 화면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이야기는 해 주지만,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죄송해요, 선생님. 기억이 안 나요. 입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고개만 끄덕거린다. 하필이면 생리까지 겹치며 아랫배가 조이는 통증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버린 탓이다. 결국 오늘도 '염증 부자'가 된 날, 항생제와 소염제가 담긴 약봉투를 받아 들며 내적 비명을 질러댄다.
수면 부족도 한몫을 하는 듯해, 집에 오면 낮잠을 자 볼 예정이었지만 눈에 밟히는 재활용품들에 시작된 청소가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뒤늦게서야 피로가 온몸을 덮쳐 온다. 이렇게 고생을 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집이 야속하다. 노력을 해도 쉬이 깨끗해지지 않는데, 원치 않는 곳은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걱정이라니. 모순적인 상황이다.
그래도 주말은 아직 남아있으니, 지금부터라도 푹 쉬자. 슬금슬금 빠져나간 기력을 잡아와야지. 누나 마음을 알았는지 다리에 몸을 부비는 강아지를 안아 든다. 그래, 오늘은 누나랑 오랜만에 뒹굴거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