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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물의 저주인가?

by 연하일휘

버튼음 뒤로 쪼르륵-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만족스럽다. 드디어 새로운 정수기를 마련했다. 마련이라기보다는, 여동생네가 새로운 정수기를 들이며 이전에 쓰던 기종을 받아온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원래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직접 수전에 연결한 필터들이 싱크대 아래에 가득 차 있던 직수 정수기를 사용했었다. 필터를 갈아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 미뤄진 탓에 정수기는 애물단지가 되어있던 터다.


필터를 교체할 때마다 싱크대 하부장이 물바다가 되곤 했었다. 분명 물도 잠그고, 호스에 남아있을 물을 다 빼놓았다고 생각하지만, 주르륵 흐르기 일쑤다. 하부장을 적시는 물을 닦아낼 때마다 혹여 나무가 썩기라도 할까 걱정이 든다. 비가 올 적이면, 집안으로 빗물들이 들이쳤던, 그렇게 가스레인지를 포기하게 되었던 시간들 덕분이다.


ⓒ 연하일휘


물의 저주라도 받은 아이일까.


아래층은 할머니, 위층은 여동생네 부부가 살던 집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내가 아래층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애가 태어나면 큰 집이 필요하지."라는 아버지의 말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여동생네 부부는 아래층, 그리고 나는 위층. 그리고 내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며 물난리가 시작됐다.


태풍이 오며 창틀이 거세게 흔들린다. 이사 온 뒤 처음 맞이하는 태풍, 정전과 단수를 대비한 준비를 하고 별다른 피해 없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출렁- 걸음을 옮기는데 바닥이 이상하다. 발이 닿으며 전해지는 압력에 장판 틈새로 물이 올라온다. 다급히 바닥에 놓여 있던 멀티탭을 들어 올렸다. 이미 그 부근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있다. 조금만 늦었어도- 아찔한 상상에 급히 콘센트들을 뽑기 시작한다.


대체 왜 집에 물이 새는 거지- 아래층에는 물로 인한 피해가 없다던데, 2층이 물에 잠긴다. 누가 보면 반지하에라도 사는 줄 알겠네- 흔들거리는 창문을 잡은 채, 밖을 내다보니 난간과 집 사이에 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어딘가에 있을 배수구가 막힌 듯, 고인 빗물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오래된 집이라 벽에 보이지 않는 금이라도 가 있는 모양이었다.


젖으면 안 되는 물건들을 들고 거실로 나간다. 헛웃음이 나온다. 부엌 장판도 출렁거리며 물을 토해낸다. 그리고 가스레인지 위로 잔뜩 물이 고이다 못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밖으로 연결되는 가스선의 구멍 틈새로 비가 잔뜩 들이찬다. 급한 대로 가스밸브를 잠근 뒤, 주변에 물받이 그릇들을 올려놓는다. 작은 갈래로 통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빗물은 수건과 걸레들을 올려놔 스며들게 한다.


비 피해가 없는 옆방으로 걸음을 옮기다 워터파크가 개장된 현관에 결국 머리를 짚고 만다. 물이 가득 차 슬리퍼들이 동동 떠다닌다. 운동화를 안 꺼내놔서 다행인가. 혹여 거실로 물이 들어올까 밖으로 연신 물을 쓸어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이 차 오른다. 결국 더 이상 손도 대지 못한 채, 방 한 구석에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후로도 비가 많이 올 적이면 집에 계속해서 빗물이 들이찼다. 남동생과 제부가 난간에 새로 배수구 두 개를 뚫어주고, 가스선이 통과하는 구멍을 막아준 뒤에야 비 피해가 멈췄다. 장판을 다 들어낸 채, 물을 쓸어내던 그날들의 기억. 그리고 젖은 벽지들에서 올라오는 곰팡이에 수시로 곰팡이를 제거하던 기억. 여동생네가 살 때는 단 한 번도 없던 비피해가 왜 내가 살기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건지. 정말 물의 저주일까.


그렇게 빗물 샤워를 하던 가스레인지를 더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아, 밸브를 잠근 채 인덕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혼자 쓰기에는 넓은, 할머니가 쓰던 식탁 한 구석에 올려둔 채 요리를 한다. 공간만 차지하게 된 가스레인지는 그 위에 쓰지 않는 선반 덮개 하나를 올려놓은 채, 식물들의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정수기가 자리하게 되었다.


파란 버튼을 눌러 물 한 잔을 따른다. 일정한 속도롤 쪼르륵- 흘러내리던 물이 정량만 컵에 담긴다. 물과 사이가 나쁜데, 이 녀석은 오래가면 좋으련만- 새 식구가 들어왔음에도 천천히 떠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물 맛이 만족스럽다. 끓인 물을 식혀 먹을 때면, 뭔가 오묘한 맛이 난다. 늘 티백 하나를 꺼내든 채 우려내고, 식기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기다림 없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다니. 꽤 만족스럽다. 이젠 정말 물의 저주가 끝났기를 바라며, 새 식구가 들어온 것을 기뻐하는 날.



water-3510210_1280 (1).jpg Pixabay


[메인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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