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신생아라는 종족이었던 것 같은데.
끼익, 캉- 살짝 비틀려버린 철문은 살짝 힘을 주어 당기자 큼직한 소음이 딸려 온다. 손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열쇠고리의 소리가 묻혀버린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바로 옆에 1층으로 통하는 문 하나가 있다. 열쇠 하나를 받고 여동생네를 들락거릴 때마다 애용하는 문이건만, 이 소리는 늘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조카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평소 거실이 소란스러울 때면, 문 소리가 그리 크게 전해지지 않지만 유독 그날은 집안이 고요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조카가 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동안 크게 앓아서 그런가, 요즘 쉽게 놀라요."
그치지 않는 울음에 등을 토닥이며 조카를 달래던 제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저를 놀라게 한 이모가 야속했는지, 고개까지 홱 돌리며 조카가 이모를 거부한다. 야아- 우리 일주일 만에 보는 건데- 여러 일정들이 겹치면서 한동안 조카를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조카를 마주하건만, 잔뜩 삐진 조카의 모습에 마음이 아리다. 사실 조카가 문소리에 놀랐던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번이 두 번째, 기어 다니다가 소파를 잡고 일어설 즈음에도 문소리에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일주일정도 이모품에 오지 않겠다며 잔뜩 삐졌었는데. 이번에는 또 며칠이나 가려나. 결국 조용히 집을 나섰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며칠이 지난 후에, 조심스럽게 여동생네 집에 들어선다. 부엌에 있던 제부가, '처형,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자 거실에서 조카가 밝은 목소리로 따라 한다.
"아녀하세요!"
번쩍 조카를 들어 올려도 웃음을 터트리며 '안녕하세요'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놀라서 삐진 것은 잘 지나간 모양이다. 한창 어른들 말을 따라 하며 익히는 시기, 꽤나 정확해진 발음으로 따라 하는 것이 신기하다. 이모 품에 안긴 채 몇 번 단어 연습을 하다 바닥으로 손을 뻗는다.
"이부! 이부 조요!"
극세사로 된 담요가 애착이불이 되며, 졸릴 때쯤이면 늘 품에 안고 다닌다. 조카를 안은 채 담요를 잡아 품에 안겨주니 얼굴을 부비다 잘근거리며 모서리를 씹기 시작한다. 너 구강기도 다 지났는데, 언제까지 입에 뭐 물 거야- 이모의 말에 그저 배시시 웃는 조카다. 조카를 내려주자 장난감을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조카의 책을 하나 펼쳐 혼자 읽어 내려간다. 조카가 다시 품으로 쏙 달려와 안긴다.
아이들에게 책 읽기 습관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앞에서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배웠다. 조금 더 큰 뒤에도 읽게 하고 싶은 책은 엄마나 아빠가 책을 읽다가 슬쩍 그 페이지를 펼쳐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이가 호기심에 그 책을 읽게 된다고. 쑥쑥 커 가는 조카는 주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 하니 책을 읽히기가 참 쉽다. 이모도 장난감 장난보다는 책 읽어주는 게 더 좋아-
책을 읽어주다 손으로 여러 그림들을 가리키며 아는 단어들을 내뱉는다. 쪼아하는 거! 배와 비행기를 보자마자 한껏 목소리가 올라간다.
"토토가! 토토가! 토토가!!!! 비행기 타쩌여!"
아이구- 두 단어 정도만 붙여 말하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제법 긴 문장을 스스로 만들어 말하기 시작한다. 세 단어, 혹은 네 단어까지도. 깔끔한 기질의 아이는 자기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발음을 주의 깊게 듣는다고, 그래서인지 조카도 한동안은 새로운 단어를 따라 말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 했었다.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에만 중얼중얼 거리는 모습에 동생네는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발음이 잘 안 되면 안 하더라. 혼자서 연습은 하던데."
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랬던 조카가 요즘에는 말문이 트였다. 어른들이 하는 단어, 문장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여동생이 둘째를 낳기 위해 산부인과에 입원했던 시기, 시어머니의 "몸조리 잘해."라는 문장을 따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문장 따라 하기에 잔뜩 재미가 붙은 모양이다. 재미가 붙은 것은 어쩌면, 주변 어른들의 호들갑에 가까운 칭찬과 애정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카가 문장을 말할 때면, 온 가족의 웃음꽃이 피어난다. 우와- 따라 말했어? 대단해~ 엄마나 아빠도, 할머니와 이모도. 모두 조카 입에서 튀어나오는 문장에 귀를 기울이고, 신기해하며 잔뜩 칭찬을 해 준다. 어쩔 수 있나. 그 조그만 것이 그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하는 모습이 귀엽고 신기할 수밖에 없는걸.
"아빠한테. 아빠한테."
"졸려? 아빠한테 안아 주세요-할까?"
"아빠! 안아 주데요!"
책을 읽다 졸린지 품으로 파고드는 조카를 안아 들고 제부에게 향한다. 제 아빠 품에 안긴 조카가 어깨에 고개를 푹 파묻으며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에 보며 더 훌쩍 커버린 녀석. 분명 신생아라는 한 종족이었던 것만 같은데, 이제는 어린이라는 한 종족으로 진화한 느낌이다. 키도 크고 말도 늘고. 예쁘다,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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