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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지고 있지만, 행복해

by 연하일휘

높이 걸려있는 줄 두 개가 휑하다. 회색과 파란빛의, 넓은 덩어리가 얹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있다. 옥상에 널어놓은 이불과 토퍼가 사라졌다. 다행히도 바로 아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회색 뭉치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불이 보이지 않는다. 혹여 옥상 바깥으로 떨어졌을까 몸을 쭉 내빼보지만,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옥상 저 구석에 고이 누워있는 이불을 그제야 발견한다. 바람이 강하긴 강했나, 그래도 겨울이불인데 저기까지 날아가다니.


여전히 머리칼을 뒤흔드는 바람이 세다. 덕분에 이불들이 다 마르긴 했지만, 흙먼지가 묻어버린 탓에 다시 세탁기에 들어가야 한다. 문제는 하늘이다. 짙은 구름들이 가득 메워져, 금세 빗방울이 떨어져 버릴 것만 같다. 집안에서 말릴까. 습한 날씨, 두툼한 겨울이불, 그리고 실내 건조.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결국 떨어진 부위에 묻은 먼지들만 탁탁 털어내고 후일을 기약한다.


아무래도 그대로 이불장에 들어가긴 찝찝하다. 결국 예쁘게 개어 방 한 구석에 밀어 놓는다. 언제쯤이면 비소식이 없는 날이 오려나. 이른 장마라도 오려는 것인지, 아직 더위가 채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빗방울들이 먼저 찾아왔다. 빨래가 고민되는 시기다. 여동생네 건조기를 빌려도 되긴 하지만, 둘째가 생기며 빨래 횟수가 늘어난 탓에 타이밍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아직 남아있는 코로나의 여파로 조카를 보러 가지도 못하는데, 조카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드나드는 것도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은 미뤄두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집어 든다. 내일모레 반납인데, 아직도 다 못 읽었다. 며칠간 책에 푹 빠져 있다가 몸이 안 좋다며 또 미뤄둔 탓이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는데, 등뒤에서 소리가 난다. 박-박- 나는 분명 고양이가 아닌 강아지를 키우는 중인데, 발톱으로 무언가를 긁는 소리가 맹렬하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아가가 개어 둔 이불속으로 파고들 듯, 앞발로 신나게 긁어대고 있다. 내 시선을 느낀 듯, 잠시 멈춰 서서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제 할 일을 하는 녀석이다.


한참을 이불을 파내고 제 머리로 밀기도 하더니만, 자리를 잡고 누워서는 누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 잘했지? 마치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이 반짝거린다. 분명 자기 쿠션도 있고, 켄넬에 좋아하는 담요도 깔아주었건만 요 녀석은 욕심쟁이다. 누나가 잘 때는 품에 잘 안겨주지도 않으면서, 그때는 자기 쿠션을 제일 좋아하면서, 이럴 때만 누나 이불을 차지하는 욕심쟁이.



자려고 누울 때면, 얼굴께로 와서는 머리를 푹 숙인다. 이불을 살짝 들춰주면 기어가듯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1-2분 정도 자리를 잡다가, 만족스러우면 그대로 눕고 아니면 탈출을 시도한다.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나가면 되건만, 꼭 이불속을 기어가서는 아래쪽으로 빠져나간다. 아쉬움에 안아 들어 함께 자리에 누우면, 요리조리 몸을 비틀다가도 쏙- 도망을 간다. 치사하네, 정말- 타박거리며 자기 쿠션에 가서 눕는 모습에 아쉬움만 표한다.


그런데 꼭 아침에 이부자리 정리를 하려고만 하면 내 이불 위로 와서 자리를 잡는다. 누나가 이불 개고 싶은데- 툭툭 건들어봐도 요지부동, 안아서 옆으로 내려놓으면 점프하듯 다시 이불 위로 올라선다. 치우지 말라는 무언의 외침이다. 그런 녀석이 다시 빨래를 해야 하는 이불 위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내려놓고 이불을 저 멀리 치워야 하나- 털어내긴 했지만, 깨끗하지는 않은데- 하지만 내가 우리 아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결국 자기 자리인 것처럼 편안한 녀석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늙은 아가지만, 갸웃거리는 고갯짓을 볼 적이면 웃음이 새어 나온다. 노화는 윤기가 사라진 털결에서만 느껴지는, 여전히 귀여움과 애교가 가득한 우리 할아버지 아기. 오늘도 제 것인 것처럼 자리를 잡는 아가에게 지고 말았다. 오늘뿐만 아니라, 늘 지고 있지만. 그런 나날들도 좋아. 아프지만 말자. 귀여운 어리광이 행복해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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