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움 너머에는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파란 빛이 방 안을 물들일 때,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하얗거나 노란 빛이 아닌, 새벽녘에만 마주하는 그 빛깔은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을 구분짓는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익숙한 내 방을 조금은 낯설게 만드는, 익숙한 새벽빛은 아쉽게도 너무 빠르게 다른 빛으로 물들어버린다. 오늘은 아침부터 조카를 보러가는 날, 오랜만에 새벽빛을 마주한다.
조카의 소아과 진료를 위해 종종 오픈런을 대신 뛰어주곤 했었다. 9시에 병원 문을 열지만, 8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대여섯명의 부모들이 계단에 줄지어 서 있곤 했다. 이번에는 제부가 직접 오픈런을 가기로 하고, 대신 그 시간동안 조카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른 아침에 마주한 조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세 품 안으로 달려와 안긴다.
품에 안긴 채 손가락으로 가고 싶은 곳을 가리키더니 도착지는 책장 앞이다. 보고 싶은 책인지, 혹은 그냥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인지 책 한 권을 꺼내 건네주더니 무릎에 털썩 주저앉는다. 옛 어른들의 말로는 아기가 무릎에 안기듯이 앉는 행위들이 둘째를 암시하는 행동이라던데. 둘째 계획이 없는 친구네 아가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랑 듬뿍 받고 자라는 아가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어진다.
조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자동차다. 누가 먼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책에 그려진 자동차를 보면 잔뜩 흥분하곤 했었다. 그 이후로는 자동차가 그려진 옷이나 장난감, 책에 푹 빠져있다. 누가 남자애 아니랄까봐- 잔뜩 신이 난 조카를 보면 절로 나오는 소리다.
장난감을 들고 잔뜩 옹알이를 하는 조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동그란 머리에 잔뜩 뽀뽀를 해 주다가 꽉 껴안으면, 어느새 잡기 놀이로 바뀐다. 이제 갓 뛰는 법을 익힌 조카를 따라 가다가 잡았다!라며 높이 안아주면 터트리는 웃음 소리에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몇 번이나 해 주게 된다. 물론 다음날이 되면 팔에 작은 근육통이 찾아 오지만.
잠시 숨을 돌리려 소파에 앉으니 조카가 다시 달려와 품 안으로 안긴다. 평소와는 달리 깊이 파고들 듯 안기는가 싶더니만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잔뜩 신이 난 탓인지, 어깨 안쪽을 꽉 깨물었다. 안돼! 물면 안돼! 조카를 붙잡고 말은 했지만. 요즘 말귀를 알아 듣기는 한다지만 이해는 했을런지. 이모는 얼얼한 어깨를 감싸쥐고, 조카는 해맑게 웃고 있고. 야, 이모 진짜 아팠어.
오픈런을 마치고 돌아온 제부를 보자 조카가 달려가서 안긴다. 조카에게 물린 이야기를 하니, 여동생도 가슴에 멍이 들었단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를 물면 안 될텐데, 걱정이네.
병원갈 채비를 하며 자동차가 그려진 옷을 입혀주니 조카의 한껏 톤이 올라간 목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빵빵! 소리를 하며 옷을 죽 늘여선 아빠에게, 이모에게, 그리고 방에 있는 할머니에게까지 찾아가 자랑을 한다. 그래, 오늘 어린이집에서도 친구한테 자랑하자- 아빠의 말을 알아 들은 것인지, 조카는 연신 옷에 그려진 자동차를 손으로 가리킨다.
문 앞에서 배웅을 하고, 나는 다시 집으로 올라간다. 한시간정도 집에서 아기를 봐줬을 뿐인데, 하루치 기력이 쑥 다 빠져나간 느낌이다. 그래도 귀여운 하루의 시작이다. 아픈 흔적도 조금은 남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