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보다는 아빠가 민망해
눈물 두어 방울이 빨갛게 달아오른 뺨에 맺혀있다. 동글한 뺨 위로 눈물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보드라운 천으로 닦아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화면 너머로는 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
"모! 모!"
울음을 터트리던 조카가 입을 동그랗게 모아 이모를 부른다. 낮잠에 들려던 찰나, 강아지가 짖는 소리에 깨 버려 잔뜩 짜증이 나 있단다. 조금이라도 달랠 심산으로 여동생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지만, 수면 부족의 짜증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우리 찡찡이 울었어?"
가끔 졸릴 때마다 짜증을 부리는 모습에 찡찡이라 불러 주었더니 그 별명이 마음에 든 조카다. 그 발음이 마음에 든 것인지, 찡찡이라 불러줄 때마다 '찡찡!'이란 말을 따라 하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오늘도 찡찡이라는 말을 따라 외치며 제 엄마의 품에서 다리를 동동 흔든다.
"찡찡아, 이모 보고 싶어?"
화면을 잠깐 응시하던 조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라?
"이모가 보러 갈까?"
또다시 끄덕끄덕. 얘 지금 내 말 알아듣는 거야?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여동생이 긍정의 답변을 돌려준다. 와, 벌써 이런 말들을 다 이해한다고? 몇몇 단어정도만 알아듣던 것이 엊그제인데, 하루이틀 사이에 또 훌쩍 커버린 모양이다.
이모가 이제 갈게- 조카가 손을 흔들며 빠빠- 인사를 한다. 결국 마스크를 하나 꺼내 들며 여동생의 집으로 향한다.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는 참으려고 했는데, 이번 만남은 불가항력이다.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에 조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다. 으쌰- 조카를 안아 올리며 추임새를 넣자, 똑같이 '으쌰-'를 따라 한다. 이젠 애 앞에서 진짜 말 조심해야겠네.
제부는 잠시 차를 정리하러 나가고, 여동생이 화장실에 들어가며 조카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모를 소파에 앉혀두고선 조카가 쪼르르 달려 나간다. 책을 가져오려나, 아니면 장난감을 가지고 오려나. 예상과는 달리 조카는 안방으로 들어가 제 아빠의 옷 하나를 들고 나온다. 아뿔싸, 그런데 옷이 아니라 제부의 속옷이다. 잘 접혀 있는 속옷을 휘휘 몇 번 흔들더니 팔랑거리며 내게 달려온다.
"아빠! 아빠!"
"응~ 아빠 꺼네. 이거 함미 갖다 주자. 함미!"
평소라면 조카가 건네주는 물건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을 텐데, 웬일로 손사래를 치는 이모의 반응이 재미있던 것일까. 내 목소리를 들은 어머님(사돈어른/여동생의 시어머니)이 방에서 조카를 부르지만, 조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내 앞에서 제부의 옷을 흔들어댄다. 요녀석,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모! 모!"
그래. 이모가 네 아빠 속옷을 만지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긴 한데. 이모보다는 네 아빠의 민망함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찡찡아? 휙- 조카가 던진 옷가지가 앉아있는 내 옆에 툭 떨어진다. 갈 곳 잃은 손은 허공에 떠 있고, 조카는 다시 제 아빠의 옷가지를 잡고 팔을 휘휘 흔들어댄다. 차라리 집안에 여동생과 조카와 나만 있었다면 별생각 없이 받아서 안방에 휙-하고 던져 놓고 쉿- 비밀로 삼았을 텐데. 사돈어른의 시선과 문 밖에 있을 제부의 존재에 묘한 민망함이 몰려온다.
다행히 제부보다 여동생이 먼저 거실로 들어선다.
"애기가 네 남편 속옷 나한테 갖다 주려고 그래."
"어머, 이거 또 어떻게 꺼내왔대?"
놀란 여동생이 조카에게서 속옷을 받아 들고 안방으로 휙 던져 놓는다. 이모를 실컷 놀리던 조카는 장난감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품으로 달려든다. 꽝-하고 조카의 머리에 부딪힌 턱에 얼얼한 통증이 몰려온다.
너 안 아프니. 이모는 눈물이 찔끔 나려 하건만, 조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맑게 웃기만 한다. 그래, 아프고 민망한 건 이모 혼자네. 조카를 높이 들어 올리며 품 안으로 안아 들자, 조카가 대신 추임새를 넣는다. 으쌰- 그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따라 하는 말이 귀엽다.
언제 이렇게 커서, 이모 말도 다 알아듣고. 이모 놀려먹기까지 하냐. 아직 남은 몸살의 기운 덕에 조카를 안은 팔뚝으로 다시 작은 통증들이 밀려온다. 이런 귀여운 장면을 볼 수 있다면야, 이모가 아픈 것쯤은 참고 또 참아야지. 마스크를 쓴 이모의 얼굴이 낯선지 계속해서 마스크를 내리려 한다. 고개를 돌리며 그 손길을 피하자, 이마저도 장난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연신 손을 뻗는다. 졸려서 올라왔던 짜증이 이제는 다 사그라들었나보다.
짧은 만남이 강렬했던, 아직은 아팠던 일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