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한다는 서러움
살갗 위로 욱신거리는 통증이 배어든다. 손끝으로 열이 오르며 작은 김이 피어오를 것만 같다. 통증과 열기가 퍼져나가는 새벽, 기어가듯 약통에서 꺼낸 체온계에는 38.0이라는 숫자가 떠오른다. 이불속으로 파고들지만, 아픔을 동반한 이불의 무게가 버겁다. 작은 움직임에도 두통이 머리를 뒤흔든다. 해열제라도 먹어야 할 텐데- 작은 읊조림은 방 안을 가득 메운 어둠 속으로 흩어져버린다. 다시 잠들지조차 못하는 새벽, 아픈 누나를 위로하려는 듯 따스한 털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강아지의 위로에 스스로를 토닥인다.
온몸에 퍼진 열기와 머리의 통증은 해가 뜬 이후에도 이어진다. 간밤에는 느끼지 못했던, 부은 목의 통증을 눈치챈다. 살갗 위로 퍼지던 통증이 깊이 스며든다. 뼈와 관절 마디마다 작은 통증이 밀려온다. 심상치 않다. 약통에서 약을 꺼내는 선택지 대신, 외투를 걸친다. 독감 환자와의 접촉이 있었기에 불안함과 통증을 해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한다.
마스크 안에서 맴돌던 뜨거운 숨결이 눈앞을 흐린다. 여러 차례 안경에 서린 김을 닦아내며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린다. 짧은 진료와 독감 검사. 망설임 없이 코 안을 깊이 찌르는 통증에 찌푸린 눈살은 몇 번의 재채기로 이어진다. 10분 정도 기다리시면 결과 나와요- 진료실 앞에 멍하니 앉아 다른 환자들을 구경한다. 콜록거리는 환자들에게는 간호사들이 마스크를 건네준다. 남녀노소, 다양한 나이대와 성별이 혼재된 이곳에서 힘없는 눈동자들이 텔레비전을 멍하니 응시한다.
4살쯤 되었을까, 이제는 아장거리지 않는 한 아이가 손을 잡고 병원에 들어선다. 이모! 이모!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아이는 이모를 부르며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진료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을 반짝이며 이모와 눈을 마주한다. 조카 보고 싶네- 이모 발음이 되지 않아 모!를 외치는 조카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오늘 조카와 여동생과 함께 조금 멀리까지 놀러 나가기로 했었는데. 내 몸이 아픈 것보다도 조카와의 시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더 서러워진다.
"혹시 혼자 왔어요?"
"네."
앳된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중학교 1학년쯤 되었을까. 변성기도 오지 않은 한 남자아이가 홀로 진료를 기다린다. 부모님에게 걸려온 전화인지, 무뚝뚝하게 어. 괜찮아. 이따 전화할게-라는 말을 하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린다. 이르게 철이 든 아이일까. 앳된 얼굴과 목소리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다행히 음성은 떴는데, 독감 초기에 그럴 수도 있어요. 증상은 독감이랑 유사해서. 약 먹고 호전되지 않으면 재검해 봅시다."
음성이라는 결과와 엉덩이 주사 한 대를 받았다. 처방전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모와 손을 꼭 잡고 있던 아이가 이미 사라졌음을. 그리고 내가 나온 진료실로 홀로 병원에 온 남자아이가 들어서는 것을 목격한다. 약국에서 따뜻하게 푹 쉬어야 해요-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향한다.
감자수프를 끓인다. 이전에 여동생에게 받아 둔 가루 수프가 요긴하게 쓰이는 날이다. 냉동실에 잘게 썰어 얼려두었던 두부를 냄비에 넣어 둔다. 약을 먹고 한숨 자면 좀 더 나아지려나. 주사의 효과가 도는지, 온몸의 욱신거리던 통증이 가라앉았다. 달달한 게 먹고 싶다- 달콤한 간식들에 대한 식욕만 올라온다. 폭신한 빵, 아이스크림, 초콜릿. 여러 가지가 머릿속을 맴돌지만, 약효가 돌며 나른해지는 몸이 식욕을 억누른다.
"모! 모!"
이불속으로 녹아내릴 듯이 몸이 늘어진다. 여동생의 영상통화에 반쯤 몸을 일으켜 얼굴을 내비친다. 양손에 과자를 들고 웃음 짓는 조카의 모습이 핸드폰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이모도 냠!"
모! 를 외치는 조카가 핸드폰 화면으로 과자를 계속해서 들이민다. 입을 벌려 먹는 시늉을 해 주니, 그제야 만족한 듯 제 입으로 과자를 가져간다. 이모, 까까 먹여주고 싶었어? 조카는 그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 암- 하며 과자를 크게 베어무는 시늉을 한다. 까까-라는 말을 익힌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큰 거지.
"이모 아야 한대, 아야."
여동생의 말에 조카가 화면을 향해 호-하는 시늉을 한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자, 조카가 만족한 듯 소리를 지르며 화면에서 벗어난다. 여동생은 애기가 계속 이모를 찾아서 영상통화를 걸었다며, 쉬는 것을 방해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방해는 무슨, 안 그래도 병원에서부터 계속 보고 싶었는데.
통화가 끊긴다. 다시 이불속을 파고든다. 약기운이 도는 몸과, 조카를 보고 좋아진 기분이 편안한 잠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빨리 나아야지. 이모를 찾는 너를 안아주려면, 이모가 빨리 나아야지. 아프지 말아야지. 품 안으로 달려들 너의 모습을 상상하며, 무릎에 앉아 책을 읽어달라며 다리를 동동거릴 너를 상상하며. 보들한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