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제, 조왕고사, 차고사
공중에 흩날리는 함박눈이 뺨에 와닿는다. 바람에 의해 얼굴로 날아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거센 바람이 눈송이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만든다. 그나마 쌓이지 않는 게 다행인 걸까. 한라산은 120cm까지 눈이 쌓였다던데, 해안가에 위치한 이곳은 눈송이들이 바닥으로 스며들고만 있다.
눈이 내리는, 그리고 계속해서 내릴 예정이지만, 세차를 해야만 하는 날이다. 명절 아침이면 부모님 댁에서 문전제와 조왕고사, 그리고 차 고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를 올려야 하기에, 세차를 해야만 하는 나로서는 내리는 눈송이들을 원망스럽다.
나는 큰집 딸내미다. 어릴 적부터 '장손'이라는 명칭이 앞에 붙어있던 아버지와 '종손'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리던 남동생과 함께 살아온. 시집조차 가기도 전에 미리 '명절 증후군'을 겪고 있는 큰집 딸내미.
명절과 제사마다 몇 시간이고 앉아 전을 지지고,
이른 아침부터 제상 차리는 것을 돕고,
손님들이 오면 앉아 쉴 시간도 없이 음식을 내가며 설거지를 하느라 바빴던,
이젠 과거형이 된 이력을 지닌 "시집 안 간" 큰집의 둘째 딸이다.
명절과 제사의 고생이 과거형이 된 것은 재작년부터 명절과 제사 때마다 이른 아침, 직접 산에 올라 묘 앞에서 차례를 지내기 시작한 덕분이다. 다만, 제사 때야 산에 오를 준비만 하면 되지만, 명절에는 여전히 집에서 제를 지낸다. 제주도 풍습 중 하나인 '문전제'와 '조왕고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문전제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조왕고사는 부엌에서 어머니가.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한다는 '차 고사'는 운전을 하는 나와 남동생이 함께 제를 올린다.
현관문을 향해 제상을 차리고, 남동생과 아버지가 함께 문전제를 올린다. 그리고 그 상을 그대로 부엌으로 옮기면, 그때부터 어머니가 조왕고사를 지낸다. 나와 남동생은 차가 있는 방향으로 따로 고사상을 차려 제를 지내는데, 몇 년이나 옆에서 일을 도왔음에도 여전히 순서나 방법은 헷갈린다. 결국 나는 제를 지내기 전 제기를 한 번씩 닦기, 쟁반에 가지런히 담긴 음식들을 들고 나르며 옮기는 일, 남동생의 지시에 따라 차 고사를 함께 지내기. 제가 끝난 이후에 음식들을 정리하기. 쌓여있는 제기들을 설거지하는 일 같은, 수동적인 일들만 담당하게 된다. 산에서 내려온 후에 내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부모님과 남동생은 저 멀리, 월정에 있는 고모할머니께 명절 인사를 드리러 가니, 피차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에 비해 일들은 줄어들었다만,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탓일까. 명절이 되면 이미 어깨가 뻐근하게 굳어온다. 몇 년이나 얼굴을 보았지만, 부엌에서 일을 하느라 서로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친척들을 만나야 하는 것도 작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동생도 먼저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았는데-라는, 제대로 대화도 해 본 적이 없는 친척의 오지랖도 한몫을 하긴 하겠지. 복합적인 감정들, 특히 불안이나 우울이라는 감정이 주를 이루는 '명절 증후군'이 이번에도 찾아오고 말았다.
부모님은 아들들만 모이는 그 자리에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곤 한다. 다른 집 딸들은 안 오는데, 우리 딸만 고생하는 게 속상하다는 어머니의 작은 하소연이 덧붙을 때도 있다. 그런 부모님의 말에도, 작은 스트레스들을 감수하면서도 산에 오르는 것은, 그저 단 하나. 그곳에 할머니가 있으니까. 자주 찾아뵈면 편히 쉬지 못한다는 말에 가고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리고 쉬고 있을 할머니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작게 인사를 건네러 가는 날이다. 할머니가 손녀 오는 날, 편히 오라고 눈 좀 그쳐주면 좋으련만. 아니면 손녀 쉬라고 눈을 더 펑펑 내려버리려나?
머리카락과 옷 위로 눈송이 몇 개가 내려앉는다. 땅 위에도 작은 알갱이들 몇 개가 제 자리를 잡아간다. 낮이 되면 날이 좀 더 풀릴 줄 알았는데, 눈송이들이 더 많이 내려앉는다. 세차를 해도 눈 덕분에 효과가 없을 것 같다는, 그리고 이런 날 세차를 하냐는 이상한 눈빛에 대한 민망함과 걱정을 꾸욱 눌러버린다. 이미 앞유리창에 소복이 쌓인 눈들을 와이퍼로 밀어버리며 세차장으로 향한다. 그래, 제를 지내려면 세차는 해야지.
강하게 부는 바람이 간헐적으로 차를 뒤흔든다. 저 혼자 돌아가려는 핸들에 어느새 두 손에 힘을 꼭 주게 된다. 어라, 세차장에 도착하니 자동세차기 앞에 이미 여러 대의 차가 줄을 서 있다. 내부세차 공간에도 차량들이 가득 들어서있다. 날씨가 좋지 않지만, 아마 나와 비슷한 이유로 온 사람들이 많은 걸까. 사람 사는 게 역시 다 비슷하구나, 흔하디 흔한 진리 하나를 몸소 체험한다.
청소기를 잡은 손끝이 추위로 아리다가 감각이 없어진다. 간간히 손을 녹이느라 예상보다 청소 시간이 길어진다. 세차가 끝난 차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들이 물방울로 변해간다. 그 작은 구체 안에 거무스름한 얼룩들이 새겨져 있다. 하얗게만 보이는 눈송이들이 미세먼지를 품고 있던 걸까. 예상은 했지만 실시간으로 검은 얼룩들이 지는 모습을 보자니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묘한 위안이 된다. 다들 그렇지 뭐, 눈이 내릴 건 알아도 세차는 해야만 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