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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목소리를 찾았다.

글빵 졸업작품

by 연하일휘

목소리가 닿은 곳마다 향내음이 묻어난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익숙한 냄새의 진원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소리를 매개로 기억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던 향 연기의 내음이 전해졌을 뿐이다. 기억을 더듬는다. 향 끝에 매달린 작은 불빛 하나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던 옅은 연기를 기억한다. 얇은 회색빛 선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은은한 내음을 남겼었다. 작은 신방에서 흘러나오던 싱그러운 과일의 향이 덧씌워진 향 내음이 집안을 가득 메웠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작은 공간이 없다. 방을 메운 것은 단 하나, 기계음 너머의 그리운 목소리뿐이다. 그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더 이상 맡지 못할 냄새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움이 소리 위로 그 모습을 그려낸다. 부드러운 손길 위로 얹히던 익숙한 무가에 숨조차 죽인 채 그저 귀를 기울인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찾았다. 인터넷이라는 낯선 그 공간 속에, 할머니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


"할머니가 영상이나........ 그런........ 기록 남기는 거 진짜 싫어했잖아."


울음이 채 멎지 않은 언니는 간간이 말을 멈추며 호흡을 골랐다. 어떻게 찾은 것이냐는,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던지며 언니는 말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발견이다. 공부를 위해 제주도 신화에 대한 책을 읽다, 문득 든 호기심에 할머니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던 것뿐이었다. '심방'이라는 단어에 덧붙은 할머니의 이름 아래 재생 버튼이 놓여 있었다. 작은 삼각형 버튼을 누르자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다시 만났을 때, 짧게 들이마신 숨이 잠시 멈췄다. 오래전, 긴 시간이 흘렀지만 기억 속에 새겨진 할머니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빠르게 두드리는 북과 날카로운 설쇠의 소리 위로 할머니의 무가가 흘러나온다. 다른 파일에서는 점괘를 풀이해 주는 할머니의 담담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비록 나를 향해 건네는 말이 아닐지언정, 당신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기에는 충분했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목소리는 더 짙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우리 할머니는 심방이었다. 무속신앙이 깊게 남아있는 제주도라는 공간 속에서 큰 심방이라 불리곤 했었다. 하지만 당신의 흔적이나 기록이 남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명단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지웠었다. 간판도 명패도, 집 앞에는 심방임을 드러내는 흔적조차 없없건만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허리뼈가 으스러져 거동을 하지 못하던 그 시기에도 수심이 짙게 드리워진 이들은 할머니를 찾아오곤 했었다.


할머니가 먼 곳으로 떠나간 이후에도 그 발걸음은 꽤 길게 이어졌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홀로 집을 지키던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입을 가리며, 말을 채 잇지 못하던 사람. 눈시울을 붉히던 사람. 손을 맞잡으며 위로를 건네주던 사람. 그리고 큰 포대에 귤을 가득 담아 온 한 아주머니는 울음에 젖은 말을 건넸다.


"돌아가신 줄은 알지만..... 그래도 올 수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는 떠나간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신을 모시며 평생을 살아왔다. 가슴에 아픔을 품고 있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을 풀어주는 심방이었다. 명시화된 흔적은 없을지언정, 유명한 큰 심방이었다. 작은 기대를 품고 할머니의 흔적을 찾았었다. 큰 심방이었기에, 오래된 자료 하나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영상 혹은 책, 논문. 제주도 심방에 대해 연구한 이들의 자료를 찾아 헤맸었다. 하지만 몇십 년 전 논문에서 한자로 적힌 이름 하나만을 발견하였을 뿐, 그 흔적을 찾지 못했었다.




candle-2038736_1280.jpg Pixabay



유품을 정리하다, 할머니를 찍은 영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그저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 속 목소리를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나 흐른 뒤, 할머니의 이름을 검색한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 헤매던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작은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목소리를 찾았다. 꿈속에서만 듣던 그리운 목소리를 다시 만났다.


가족들에게 할머니의 목소리를 전해줬다. 메시지 옆 숫자들이 하나씩 줄어들지만, 그 누구도 답이 없다. 조금 긴 시간 이후,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젠 기억 속에서도 가물거리던 할머니의 목소리였다고, 꿈속에서조차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고. 다시 만난 그리운 목소리에 언니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여동생의 집을 향한다. 조카가 보고 싶다. 할머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태몽도 미리 꿔 주고 간 조카를 품에 안고 싶다. 집안이 고요하다. 아직 낮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다, 여동생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내가 찾았지만, 신기해. 할머니 돌아가신 다음에도, 찾았었는데. 그땐 아예 못 찾았었거든."


"할머니가 못 찾게 막아둔 거네."


여동생이 담담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를 찾았다면,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웃으며 할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이기에 목소리도 견딜 수 있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일 테다. 너무 아프지 말라는, 할머니의 손길이 잠시 흔적들을 숨겨두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난 조카를 품에 안는다. 코끝을 맴돌던 향내음은 아기 냄새에 가려진다. 할머니가 정말 예뻐했을 텐데- 잠기운에 이모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는 조카를 힘껏 껴안는다. 따스한 체온이 피부 위로 전해진다. 할머니가 떠나가며, 선물처럼 주고 간 아가. 여전히 그리움이 사무쳐 홀로 눈시울을 붉히는 손주가 걱정돼 더 사랑스러운 아가를 건네준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큰 심방이라 다행이야, 그치?"


잃어버린 할머니의 목소리를 찾았다. 기록도 흔적도 남기기 싫어했던 할머니의 유일하게 남은 목소리 하나를 되찾았다. 보고픈 마음을 담은 두 팔로 작은 체온을 끌어안는다. 그리운 목소리 위로 조카의 잠투정과 같은 옹알이가 덧씌워진다. 받은 사랑을 다시 전한다. 그리움을 아픔 대신 사랑으로 전해본다.


[메인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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