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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동심을 묻어두고.

경계선에 서 있는.

by 연하일휘

톡- 정수리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분명 차가웠는데, 어느샌가 미지근하게 식은 채 목깃을 적시는 것을 보면, 날이 풀리긴 풀리는 모양이다. 어디서 떨어진 물방울일까. 서 있는 자리 옆으로 털썩, 작은 눈뭉치 하나가 떨어진다. 지붕에 쌓여있던 눈이 녹아내리며 남긴 작은 흔적이었구나. 세상을 하얗게 뒤덮던 눈이 바닥을 흠뻑 적시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처마 곳곳에서 불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조금만 속도를 더한다면 마치 빗소리처럼 들릴 눈의 흔적들에 채 답하지 못한 한 아이의 질문이 떠오른다.




"고드름은 왜 생겨요?"




그때는 왜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러게. 왜 생기는 거 같아? 나의 반문에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읊기 시작한다. 눈이 내리다가 공중에서 얼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해맑은 아이의 추측에 그저 웃었던 그때,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추위에 얼음이 된 것이라는 단순한 답변을 해도 되었을 텐데. 창밖을 가득 메운 함박눈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아이에게 집중을 하지 못했었다.



하얀 세상을 두고 학원에 들어선 아이들은 잔뜩 실망을 했다. 누구는 엄마 허락받고 학원 안 나왔는데. 그래서 친구들이랑 눈싸움하는데. 아이들의 볼멘 이야기에 학원을 땡땡이치지 않은 아이들을 칭찬해 준다. 엄마아빠가 무서워서, 혹은 선생님에게 혼날까 봐.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지금의 흥겨움을 미룬 아이들이 기특할 뿐이다. 창밖으로 아이들의 신난 함성이 간간히 스며든다. 금세 운동장을 뒤덮은 눈은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의 흥을 돋운다. 퇴근길을 걱정하는 선생님들과는 대비되는, 그저 한껏 신난 아이들.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겠지만, 때마침 쉬는 날이던 남동생이 출근을 도와줬다. 초등학생들 뿐만 아니라 중학생들도 서로에게 눈을 던지며 노는 모습을 보며, 남동생이 흔한 문장 하나를 내뱉는다.



"동심이 사라지긴 했나 봐. 이젠 눈이 와도 좋지 않은 걸 보면 말야."



눈이 내릴 때, 출퇴근의 걱정과 질척거리는 땅에 대한 불만이 먼저 떠오르면 그땐 어른이 되는 것이라 했던가. 그저 하얀 눈을 보며 근질거리는 아이들과는 달리 걱정과 불만이 동심의 경계선인 듯하다. 나는 언제부터였더라. 눈을 보며 동심이 사라졌던 건.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대학부지 구석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던 그때가 마지막으로 즐거움이 더 컸던 시기 아니었을까. 그 이후부터 눈에 대한 두근거림이 점차 줄어들었다. 운전을 시작하며 더더욱 눈이 내리지 않기만을 바라기 시작했었다.



얼마 전, 가족들과 펜션에 갔을 때. 잠시나마 혼자 테라스에 앉아 내리는 눈을 멍하니 구경했었다. 함박눈 한 올 한 올이 난간에, 풀잎에, 앙상한 나뭇가지에 내려앉으며 고요한 밤을 채색하던 날. 그 순간의 나는 잠시나마 동심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걱정도, 불만도.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배제한 채 그저 하얗게 물들어가는 세상에 푹 빠져들어 있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던 날, 눈이 내려앉는 소리가 사각거리며 귓가에 어른거렸다.



어쩌면, 동심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켜야 할 것이, 걱정해야 할 것이 많아지며 억눌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면, 늦은 밤 퇴근하는 어머니를 모시러 갈 수 없어지니까. 혹여 갑작스레 응급실에 가야 할 일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테니까. 눈을 좋아하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기엔, 노견이란 이름에 안타까움이 커져 버리니까. 소복이 쌓인 눈에 결정된 휴원은 보충수업이란 이름으로 바쁜 주말을 다시 선사할 테니까.



걱정도, 불안도, 불만도. 그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는 순간에서야 슬며시 고개를 꺼내드는 동심. 나는 동심이 사라진, 각박한 사회 속 메마른 어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나는 내 손안에 있는 것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그 두근거림을 억눌렀을지도. 찰나의 아름다움에서 고개를 돌려, 현실의 변화를 걱정했을 뿐일지도 몰라. 그래서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동심을 지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부러움보다 그 즐거움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의 대리만족은 아니었을까.



세상을 물들이던 눈이 하룻밤 새에 녹아내렸다. 질척거리는 길을 걸으면서도, 드디어 운전을 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먼저 찾아온다. 오늘은 부모님을 모시고 다닐 수 있겠구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눈이 녹았다며 외쳤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쌤은 눈이 녹아서 좋은데?라는 말에 아이들은 야유를 보냈겠지.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 상상이 스쳐 지나간다.


snowflake-2618306_1280.jpg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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