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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둔 '나'를 빌려옵니다.

<가모가와 식당>, 가시와이 히사시

by 연하일휘

손가락 사이로 넘긴 책장의 두께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한 권의 책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며칠간은 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책에만 집중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집중력이 다 고갈되었나 생각을 했었건만, 아직은 책을 읽을 때 빠져들 수 있음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책상 아래에 자리 잡은 강아지 덕에, 조금은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다 보니 목과 어깨에 뻐근함이 몰려왔지만요.


우울감이 오랜만에 덮쳐왔습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아이라서, 정말 오랜만에 현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책'이라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렵지 않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라서 그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요. 가볍게 선택한 책을 가볍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조금 더 빠르게 읽을 수도 있었지만, 그저 스쳐 보내지 않으려 필기도 하고, 혼자 작가의 취향을 추측해 보면서. 책 읽기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가모가와 식당>. 형사 출신인 가모가와 나가레는 딸 고이시와 함께 '음식을 찾아주는 탐정 사무소'를 운영합니다. 포렴도 간판도 없는 식당, 잡지에 주소도 연락처도 없이 "음식을 찾습니다"라는 한 줄의 광고만을 띄워둔 탐정 사무소 식당입니다. 불친절한 광고이지만, '인연'이 맺어지며 다양한 사람들이 식당을 찾아옵니다.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지닌 그들은 '가모가와 식당'에서 추억이나 기다림과 같은 향신료를 더해가며 자신들이 찾고 싶었던 음식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릴 적의 '요리왕 비룡', '미스터 초밥왕', 조금 더 큰 이후에는 '심야식당'. '음식'과 '추억'이 연결되는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음식이라는 것이 주는 즐거움이 작지 않은 이유일지, 혹은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추억'들과 잘 맺어질 수 있는 것인지.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을 좋아해 자주 접하던 중, 이 '가모가와 식당'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도 뒤의 내용들이 예측이 되는 흔한 에피소드들도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움보다는 편안함이 더 좋았던, 마음이 잔잔해지는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아스카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 할아버지와 5살 때 간 여행에서 먹은 '나폴리탄'을 찾고 싶어 식당을 찾아옵니다. 식당에서 그 나폴리탄을 다시 만나고, 할아버지와 함께 먹기 위해 레시피를 건네받으며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할아버지랑 먹은 수많은 음식들 중, 다섯 살이던 당시에 먹은 스파게티가 왜 마음속에 남아있었을까, 하는 질문이요.




"5살이 되자, 할아버지가 손녀를 어엿한 한 인간으로 대해주었고, 그 후에 처음 떠난 여행이라 그렇지 않을까?"

나가레의 말에 아스카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까지는 늘 요리 한 접시를 나눠 먹었는데, 그 여행부터는 손녀를 어엿한 한 사람으로 대해주었어요. 그 증거가 바로 스파게티 한 접시였죠. 내 앞에 나 혼자만 먹는 요리가 있다는 그런 사실이 어지간히 기뻤겠죠."
"........."

아스카는 뭔가 할 말을 찾으려다 결국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눈물이 나오게 된 것도 같은 이유일 거라고 봅니다. 아마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과 소중한 가치관도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학생의 기억 한 편에 남은 거겠죠."

- <가모가와 식당>, 가시와이 히사시. P.217-218



어린아이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더 이상 음식을 덜어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단 한 그릇의 음식을 받았을 때 아이들의 감격을 어른들은 모르겠지요. 그리고 그 감격이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무의식 속에 담겨 '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함께 담긴 할아버지의 '감사하는 마음'과 '소중한 가치관'이 잊지 못할 음식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옆에 떠다 두고 책장을 넘겼습니다. 잠시 핸드폰은 먼 곳에 가져다 두고, 글자들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책상에 올려둔 책을 자세히 보려 앞으로 몸을 기울이기도, 혹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책을 들고 읽기도 하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학교가 끝난 뒤, 물 한 잔을 뜨고 책상 앞에 앉았어요. 그때, 불을 켜지 않았지만 길게 노을 진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와 책상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한참을 책을 읽어 내려갔었습니다. 중간에 밥을 먹어야 할 때면, 후다닥 먹고선 다시 책상 앞으로 달려갔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층 침대의 아래층에서, 반만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반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책을 손에 꼭 쥐고 있기도 했었지요. 꿈속에서 책을 읽다가, 책을 쥐고 있는 자세 그대로 깨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책은, 한없이 빠져들 수 있었던 소중한 존재였었습니다.


그러다 입시 공부를 시작하며, 책을 조금씩 조금씩 미뤄두었습니다. 한 번 잡으면, 또 책 읽기에만 열중해 버릴 테니. 나중에 읽자며 미루고 미루다 어느샌가 책이 손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큰 마음을 먹어야만 읽게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며칠간 다시 책만 손에 잡고 읽어 내려가다, 어릴 적의 장면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저 책 속의 이야기들을 탐구하는 것이 즐거웠던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이, 복잡한 생각보다 그저 읽기의 즐거움을 찾아내었던, 조금은 기특하던 '나'가 떠오릅니다.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른이 되어해야 할 일들을 미루면서 책만을 읽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잘못된 방법이겠지요. 그래도 잠시만, 며칠간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때의 '나'를 부분적으로 '현재'로 끌어오는 것도요. 아주 잠시만요. 마음의 힘듦을 잠시만 다스릴 정도로만요.


조선시대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서자의 신분으로 가난함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음을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책을 읽었던 그는,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책'을 선택했다고 해요. 이덕무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당시엔, 반쯤은 이해를 하면서도 반쯤은 의아해했었더랬지요. 요 며칠간의 경험 속에서, 이덕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한때는 우울이 찾아올 때면, 노래방을 가기도. 게임을 하거나, 웹툰을 읽기도 하고. 친구와 몇 시간을 수다를 덜며 떨쳐내려 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는 눈물이 툭하고 터져 나와,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했었지요. 그러다 오랜만에 천천히 편안하게 마음을 다스려 나갑니다. 책들을 읽어나가면서요.


모든 것들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여전히 남아있지만. 내일도 도서관에 가서 새로운 책들을 빌려오려 합니다. 장서 사이를 훑어보고 걸어 다니다가 눈길이 닿은 책 몇 권을 데려오려 합니다. 읽다가 포기하는 책들도 있겠지만, 눈길과 손끝의 인연이 닿아 마음속에 자리 잡을 책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해서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돼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연이 있는 분은 여기까지 꼭 찾아오세요. 당신처럼."

- <가모가와 식당>, 가시와이 히사시. P.137


새로운 책과의 인연을 만들어 봅니다. 어린 시절, 나와 책 둘만의 관계 속에 푹 빠져들었던 것처럼요. 마음을 토닥토닥거리면서, 마지막 장을, 마지막 글자를 읽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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