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나마 담겨 있는 모습
두 손으로 잡기도 벅찬 큰 우유 하나를 온몸으로 감싸 들어 올린다. 그 작은 몸으로 1L짜리 우유를 어떻게 들어 올리는 것인지, 무거워 뒤뚱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품 안으로 번쩍 안아 올린다. 추운 날씨에 찬 우유를 잡은 손이 시릴까, 대신 들어주려 하지만 '우유. 우유'라며 품에서 떼어 놓을 때마다 울음을 터트린다. 누굴 닮아서 우유를 이리도 좋아하는지. 아마 제 엄마를 꼭 닮은 거겠지.
동생네와 함께 마트에 다녀오며 우유 하나를 구입했다. 조카의 간식들은 이미 여동생이 택배로 불러 잔뜩 쌓여있어, 오늘은 냉장고를 위해 장을 보는 날이다. 과자가 진열된 곳을 돌아다녀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조카는 이모가 들어 올린 우유를 달라며 칭얼거린다. 제 품을 가득 채우는 우유를 안고서는 기분이 좋은지 조그마한 손으로 우유 입구를 만지작거린다.
조카 나이대 아이들 중에서는 우유를 싫어하는 아이가 없다지만, 연결고리를 찾고 싶은 마음 덕분일까. 흰 우유를 좋아하는 모습마저 '닮은 꼴'로 바라보게 된다. 신생아 시절, 잠시 겪고 지나갔던 조카의 유당불내증까지도.
나와 여동생은 둘 다 유당불내증이 있다. 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둘 다 몸이 많이 피로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흰 우유를 마시고 종종 탈이 나는 정도다. 그럼에도 그 특유의 고소함에 푹 빠져 있어 포기하지 못하는 음료 중 하나다. 고등학생 때는 바게트빵 혹은 다이제 비스킷과 우유 500ml 하나를 식사 삼아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살곤 했었으니. 특히 내게 있어서 흰 우유는 추억과도 이어진다.
우유를 고를 때면 언제나 제1순위는 가격이다. 브랜드마다 맛이 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막입의 혀는 그 미세한 차이를 구별하질 못한다. 딱 하나, 멸균우유만 아니라면 가장 저렴한 제품을 선택한다. 이때 하나 더 살펴야 하는 것은 원유 함유량. 저렴한 우유가 나왔다며 신이 나 구입해 먹었건만, 둔하디 둔한 이 입에서도 물 탄 우유의 맛은 목 넘김이 쉽지 않았다. 원유 함유량이 80%쯤 되면, 이건 우유인지 우유맛 물인지. 가격은 저렴할지라도 그 이질적인 맛은 우유를 마시는 순간의 그 즐거움을 앗아가 버리는 불청객이 되어버린다.
우유와 함께 먹을 간식거리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저 투명한 컵에 따라진 우유 한 컵이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운 간식 시간이 만들어진다. 부들거리듯이 입안으로 퍼지는 그 고소함 속에 녹아 있는 진한 단맛이 매력적이다. 이 우유에 좋아하는 향의 커피가 더해진다면, 하루의 시작을 여는 하나의 활력소가 된다. 우유잼을 만든다거나, 빵을 만든다거나. 그 특유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주가 가능한 우유에 질리는 날이 오기나 할까.
집으로 돌아온 조카는 우유를 마시고 싶다며 칭얼대기 시작한다. 유아용 우유 하나를 빨대컵에 넣어 손에 쥐어주자, 그제야 이모의 우유를 손에서 내려놓는다. 슬그머니 장바구니 속으로 우유를 숨겨 놓고 발을 동동거리며 신이 난 조카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이모 뒤통수는 납작한데, 우리 조카 뒤통수는 왜 이리 동그랗게 예쁠까. 질투보다는 '너라도 예뻐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가 찾아온다.
"근데 분명 얼핏 보면, 너랑 조카랑 안 닮은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또 닮긴 닮았네?"
"아마, 나랑 여동생이 닮았으니까?"
친구와 함께 조카를 보던 날, 신기하다는 듯이 친구가 건넸던 말이다. 어릴 적에 나와 여동생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듣곤 했었다. 성장하며 서로의 스타일이 달라지며 줄어든 말이지만, 여전히 닮은 꼴이 남아 있기는 하다. 조카와 여동생이 꼭 닮았으니, 아마 나와 닮은 꼴도 희미하게나마 담겨 있긴 하겠지.
어느 날은 제 엄마를 꼭 닮았다가. 어느 날은 제 아빠를 꼭 닮았다가. 어느 날은 할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은 할아버지 닮은 꼴이 눈에 들어오는. 그 예쁜 얼굴 하나에 제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조카의 얼굴'이 자리 잡혀 있다. 매일같이 변하는 듯해도, 그 특유의 매력이 담긴 눈웃음만은 변치 않으니까. 마치 우유처럼, 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매력을 담고 있는 너. 점점 자라나며 또 어떤 모습들이 더해질까. 어떤 모습들로 변해갈까. '너'이기에, 동생이 태어나더라도 네게 향하는 사랑이 변치 않을 것임을 이모가 장담해. 그리고 약속해.